1945년의 삐삐가 묻는다…아직도 동심·교훈에 어린이들을 가둬놓느냐고

2023.07.24 21:46 입력 2023.07.25 02:04 수정
김유진

(36) 보슬비 선생님께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표지 그림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표지 그림

수해를 몰고 온 긴 장마에 선생님을 한번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산다는 일 곳곳이 얼마나 장대비 같은지, 보슬비에 의탁하고 싶은 날들이라고나 할까요. 예전에는 보슬비라는 인터넷 아이디가 정겹기는 해도 선생님께서 평론가로 보여주신 엄정한 지성이나 세련미를 담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그 이름이 마음에 젖어 옵니다. 어떤 죽음은 죽음 이후에 오히려 삶보다 가까워져 오는 것인지 저는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후 ‘선생님의 평론’과 ‘평론가인 선생님’을 더 자주 생각합니다. 이제 몇 달 있으면 선생님의 5주기를 맞네요.

며칠 전에도 가슴 아픈 죽음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하신 젊은 교사의 소식에 미어지는 마음이 가시질 않습니다. 교실에서 어린이와 만날 일을 꿈꾸어 오셨을 선생님의 날들은 이제 영영 중단되었습니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죽음이며 더군다나 젊은 교사의 죽음은 오늘날 어린이가 살아가는 현실과 연결되어 있으니 더욱 침잠에 빠져 헤어 나오기 힘듭니다. 아동문학을 하는 저로서는 어린이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공간의 하나인 학교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 잘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데 대한 자책감도 듭니다.

문학이란 일은 종종 현실 앞에 무력감과 무용함을 느끼게 한다는 걸 여러 번 경험했지만 그것이 반복된다고 해서 자괴감이 줄어들지는 않네요. 더군다나 문학 중에서도 특히 아동문학을 한다는 일은 여느 보편적인 현실이나 다수의 사람들에 앞서 어린이에게 특별히 가닿아 있는 만큼 어린이의 현실과 관련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더욱 힘이 듭니다. 어린이가 학대당하고, 공공장소에서 쫓겨나고, 교육받을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데 어린이가 읽는 문학에 골몰하는 건 현실도피적이고, 비겁하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사실 저는 ‘(아동)문학주의자’였고, 그런 문학적 입장을 고수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아동문학을 처음 만난 25년여 전에는 대개 교사나 양육자 등 어린이와 관련된 분들이 아동문학 장에 있었지만 저는 그저 문학의 한 분야로서 아동문학에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동문학이 지닌 문학적 특성이 좋았지, 어린이 독자가 읽는 문학이라는 자각은 그다지 없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시인으로서, 평론가로서 ‘(아동)문학주의자’의 정체성을 지키는 게, 조촐한 미학성에 만족하는 듯 보였던 아동문학 장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아름다운 동시를 쓰고 싶었고, ‘인상비평’ 수준에서 벗어나 작품의 결을 섬세히 해석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린이가 읽을 시를 쓰고, 어린이가 읽는 문학 작품에 대한 비평을 쓰는 일의 한가운데는 늘 ‘어린이 독자’가 있음을 곧 알게 됐습니다. ‘어린이 독자’에 대한 고려는 독자인 ‘어린이’에 대한 고려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어린이’에 대한 고려란 ‘어린이는 자기 일상과 관련된 쉽고 재미있는 작품을 좋아한다’는 식으로 독자 반응을 예측하고 그에 부합하려고 애쓰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어른인 나는(작가는) 타자인 어린이를 어떻게 이해하며 작품에 담으려고 하는지’에 대한 자기반성(해석)이었습니다. 창작이든 비평이든 아동문학을 하려면 반드시 ‘어린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성찰이 요청됐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선생님의 평론을 비롯해 아동문학 평론이 줄곧 강조한 ‘어린이 인식’ ‘어린이상’ ‘어린이관’이 뜻하는 바였습니다. 2020년 평론집을 출간한 저는 지금까지 아동문학이 자기반성적으로 축적해 온 어린이의 ‘타자성’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다양성’의 윤리가 요청되는 시대 흐름에 맞추어 어린이의 ‘소수자성’이라고 이름 붙였고요. 지금 사회에서 어린이 담론의 변화를 만들어 가는 분들이 아동문학 평론가, 작가, 편집자 등 아동문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겁니다. 100년 전 방정환에서 시작해 이원수, 이오덕을 지나 1990년대 말부터 오늘날 현실에서 고민해 온 어린이의 ‘타자성’을 아동문학을 하는 이라면 누구나 공유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여년 간 아동문학 장에서는 어린이를 타자화, 대상화, 식민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상식으로 자리했습니다. 어린이의 ‘타자성’에 대한 자각, 어린이를 ‘타자화’하는 일에 대한 경계를 사회 어느 부문 못지않게 체화했고 요즘은 아동문학 장 바깥으로까지 어린이를 어른과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고 존중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이제야 비로소 우리 사회에서 널리 공감받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장면을 보셨으면 얼마나 신나셨을까, 선생님과 함께 기뻐하며 또 다른 앞일을 의논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가끔씩 생각하곤 합니다.

선생님께서 현장에 계셨던 그 시대에 어른이 어린이를 ‘타자화’하는 일에 대한 반성은 ‘어린이 주체’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1945년 출간된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이 이미 보여주었던 것처럼 우리 동화 역시 어른의 권위, 규율, 제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힘이나 어린이들만의 연대로 성장을 이루는 어린이를 재현했습니다. 비평 역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어린이 인식을 작품 평가의 중요 기준으로 삼았고요. 돌이켜 보건대 그건 민주화라는 시대 소명에 따라 일종의 반권위와 맥락을 같이한 지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 이후 세대인 저는 요즘 그 점을 새삼 느끼며 그 의미를 재평가해 보고 있습니다. 당시 아동문학이 지향한 ‘어린이 주체’는 억압되고 억눌린 존재들을 해방시키고,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찾아주는 일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걸요.

아동문학의 폐해인 ‘동심주의’와 ‘교훈주의’에 대한 비판은 당시 창작과 비평의 실제 작업에서 좀 더 구체적이고 유용한 기준이 되어 주었습니다. ‘동심주의’는 이미 1930년대 아동문학에서부터 비평 담론을 구성한 중요 개념이고 1970년대 이오덕에게서 또다시 부각됐는데요. ‘동심천사주의’라고도 하듯 어린이를 천사처럼 순진무구한 존재로 묶어두려는 문학적 시도에 대한 비판입니다. 어린이를 현실과 유리된 채 살아가는 천진한 존재로만 바라보며 작품에 그리는 건 세태에 찌든 어른이 자기 욕망을 투사하는 일이라고요. 어린이를 타자화하는 가장 흔한 태도일 겁니다. ‘교훈주의’는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아동문학 작품을 접근하는 시선이고요.

그런데 저는 우리 아동문학에서 당연시되어온 ‘어린이 주체’와 ‘성장’, ‘동심주의’와 ‘교훈주의’ 비판이 오늘날 다시 고찰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시 선생님께서는 마땅찮으실지 모르겠어요. 지난 20년간 아동문학의 상식이던 이 개념들을 반성적으로 살피려는 이유는 오늘날 어린이들의 현실이 예전과는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어린이에게는 타자와 대립하는 주체, 자기 완성으로서의 성장 이상의 의미가 필요해 보여서입니다.

지금까지 아동문학은 타자(어른)의 억압에 대항하는 어린이 주체를 강조했지만 내일을 살아가는 어린이에게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정립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인간 주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온 문명이 줄곧 반성의 대상이 되고 기후위기가 눈앞에 다가와 있는 세계에서는요. 자기완성과 자아 독립을 강조한 성장 서사 역시 우리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자기 개발 서사와 뚜렷한 차별성이 있는지 반성해 봅니다. 부모가 어린이에게 실수하고 실패할 기회를 허락하지 않고 어떤 좌절도 없이 완성되는 성공으로 이끌어 주겠다며 어린이 발밑에 난 잡초와 돌들을 제거하는 게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이요. 체제와 권위를 기계적으로 전복하던 과거와 다르고, 오늘날 신자유주의에 포섭되지도 않는 ‘어린이 주체’와 ‘성장’을 선생님께서 계시던 그때처럼 다 함께 북적이며 고민하고 싶습니다. 시대를 거부하는 욕심일까요.

‘동심주의’와 ‘교훈주의’ 비판이 빈 구호에 그치지 않고 지금 얼마나 실질적인 비전이 되는지도 따져봐야 할 듯싶습니다. 혹시 저희 어른들이 ‘동심주의’를 염려하느라 어린이 재현에 막연한 거리를 두거나, ‘교훈주의’를 피하느라 모든 문학이 당연히 지니는 계몽성까지 도외시하지 않았는지 짚어 봅니다.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외국문학인 영미 아동문학을 보면 최근 ‘다양성’이란 가치를 아주 적극적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 아동문학은 어떤 비전과 윤리를 공유하고 있는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바를 찾기 힘듭니다.

‘동심주의’와 ‘교훈주의’를 경계한 나머지 우리 아동문학 작품들이 그저 어린이 편을 들어주는 좋은 어른의 흉내만 내려 하고 어른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방기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되물어 봅니다. 어린이 존재에 대한 탐구는 쏙 빼놓은 채 미학적 형식에 집중한다거나, 어린이 독자를 문학으로 유인하기 위해 놀이만큼 재미있는 작품을 주려고 한다거나 하는 핑계로 말입니다. 이는 지금 많은 어른들이 학업이나 엉뚱한 부분에서는 어린이를 지나치게 통제하면서 정작 어린이의 성장을 위해 가르쳐야 할 일들을 모르거나, 외면하거나, 수행하지 못하는 현실과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어른이 어린이가 읽는 문학을 창작하는 데서 근원적으로 발생하는 거리는 앞으로도 아동문학의 과제로 남아 있을 테고 ‘동심주의’와 ‘교훈주의’는 이를 돌아보는 데 여전히 도움이 되는 잣대입니다. 하지만 이는 ‘동심주의’와 ‘교훈주의’를 개념으로서만 비판하는 게 아니라 오늘날 아동문학 작품에 어떠한 모습을 띠고 변화되어 나타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살필 때 가능할 것입니다. ‘동심주의’로 왜곡된 어린이에서 벗어나 현실의 어린이를 늘 발견하고 그들에게 이야기할 진짜 교훈을 고민해 나가는 과정에서요.

선생님. 용서를 청하건대, 서간문은 청자를 향하는 듯 보여도 결국 필자 안에 청자가 가두어지는 일방적인 발화 방식이며, 이처럼 지면에 발표되는 서간문은 한 사람에게 토로하는 척하지만 다른 독자를 외면하지 못하는 위선적인 형식임을 이 글을 쓰기 전부터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감히 선생님을 부르며 시작한 게 글을 쓰면서 점점 송구스러웠지만 젊은 교사의 죽음이 불러온 슬픔을 두고 어린이의 현실과 아동문학을 말하자니 내밀한 고백의 형식이라도 빌려야 했다고 변명을 구합니다. 선생님께서 평생 아동문학 평론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했던 일들이 모쪼록 어디에서든 이어지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김유진

[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1945년의 삐삐가 묻는다…아직도 동심·교훈에 어린이들을 가둬놓느냐고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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