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돌

빼앗긴 바다 찾으려…어부들도 “독립 만세”

2019.02.27 21:46 입력 2019.02.27 23:14 수정

국립해양박물관 ‘어민들의 항일운동사’ 발굴

일제, 식민어촌에 일본 어민들 이주시키고 남획·차별 일삼아

1919년 3월 함흥·여수서 만세운동…전국 어촌 항거 이어져

일제가 자신들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부산에서 개최한 수산박람회의 기념장. 국립해양박물관 제공

일제가 자신들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부산에서 개최한 수산박람회의 기념장. 국립해양박물관 제공

1919년 3월1일.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장터로 쏟아져 나와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지금까지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우리 바다를 지키며 살아가던 많은 어민들도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국립해양박물관과 해양수산부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28일부터 6월2일까지 부산 국립해양박물관에서 ‘어부들의 대한독립만세 전시회’를 연다. 이번 전시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자행된 어업 수탈과 그에 맞선 우리 어민들의 항쟁을 살펴볼 수 있다.

국립해양박물관의 연구에 따르면 일제는 우리나라에 ‘식민어촌’을 건설한 뒤 거기에 일본 어민들을 이주시켜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하는 데 골몰했다. 일제는 1907년 우리나라 모든 바다의 수심과 수온은 물론 어종, 어구·어법까지 상세하게 담은 <한국수산지>를 발간해 일본 어민들의 조업을 돕는 지침서로 사용하도록 했다. 우리나라에 온 일본 어민들은 남획을 일삼았다. 일제는 이어 1908년 어업법을, 1911년 조선어업령을 각각 시행하면서 모든 어민들에게 통감부와 조선총독부에서 면허를 받도록 했다. 당시 일제는 어업면허의 종류를 잘게 나눈 뒤 수익이 많은 신식 어업은 일본어부에게만 허가하는 등 우리 어부들을 노골적으로 차별했다.

일제의 이런 만행에 어민들은 분노했다. 1919년 함경남도 함흥에서는 기독교인 등을 중심으로 3·1운동 준비 작업이 진행됐다. 함흥장날인 3월3일, 드디어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여기에 함흥지역 어민들이 대거 참가했다. 이 만세운동은 6일까지 이어졌다. 같은 날 전남 여수에도 독립선언서가 전달됐지만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 좀처럼 만세운동이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웃 광양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여수의 어민들도 대거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밤에는 해변과 섬에서 봉화를 올리며 만세를 부르고, 어선에 태극기를 달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운동은 겨울까지 이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에도 어민들의 항거는 이어졌다. 1924년 함경남도 홍원의 어업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어 일제에 대항했고, 1925년 함경북도 주을온면 차향동 어민 50여명은 파업으로 일제에 맞섰다. 1926년 경남 통영에서 일본인이 통영 어장을 독점하고 어장사용료를 끊임없이 올리자 어민들이 단체로 탄원서를 내면서 저항했다. 이후 제주 추자도(1926년), 함경남도 홍원(1927년), 경남 통영(1928년), 함경북도 이원(1929년) 등에서도 잇따라 어민들의 항거가 이어졌다.

1930년부터 1932년 사이 제주에서는 일본 상인이 해산물을 부당하게 싸게 매입하자 해녀조합이 항쟁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여러 차례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조합이 해산물을 정상가격으로 매입하지 않자 제주지역 해녀 1000여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국립해양박물관 김윤아 팀장은 27일 “당시 우리 어민들의 싸움은 단순히 물고기를 더 많이 잡기 위해서가 아닌, 우리 바다에서 자유롭게 어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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