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미국 경제시스템은 선진적인가?

2011.11.08 22:01 입력 2011.11.09 10:10 수정

양극화·시장만능의 미국 경제모델 2008년 끝났다

“중국은 쫓아오고 일본은 앞서가는 상황에서 샌드위치 신세여서 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고생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이 한반도의 위치다.”(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2007년 1월 전경련 회장단 모임)

이건희 회장의 ‘샌드위치론’은 당시 한국 사회에 “이대로 머물러 있다가는 뒤처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불러왔다. 참여정부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내세운 목표는 서비스 강국이다. 일본은 기술에서 한발 앞서가고 중국은 무섭게 추격해오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경제가 나아갈 길은 “서비스산업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목표인 서비스 강국으로 가기 위한 수단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었다. 한·미 FTA라는 외부 충격을 통해 “낡은 일본식 법과 제도를 버리고 미국식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것”(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참여정부의 구상이었다. 다시 말해 FTA는 단순히 관세를 철폐하는 무역협정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사회·경제·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불필요한 규제’를 완화해 한국을 투자자가 규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곳으로 탈바꿈시키는 전략인 것이다. 참여정부는 이 전략에 따라 2007년 4월 한·미 FTA 협상을 타결했다.


<b>녹아내리는 ‘경제’</b> 2008년 9월 전 세계를 휩쓴 글로벌 금융위기는 ‘서비스업이 전체 경제의 80%를 차지하는 미국식 모델이 선진경제’라는 신화를 무너뜨렸다. 이를 상징하듯 그해 10월29일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에 설치된 ‘ECONOMY(경제)’라는 거대한 얼음 조각상이 녹아내리고 있다. | AP연합뉴스

녹아내리는 ‘경제’ 2008년 9월 전 세계를 휩쓴 글로벌 금융위기는 ‘서비스업이 전체 경제의 80%를 차지하는 미국식 모델이 선진경제’라는 신화를 무너뜨렸다. 이를 상징하듯 그해 10월29일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에 설치된 ‘ECONOMY(경제)’라는 거대한 얼음 조각상이 녹아내리고 있다. | AP연합뉴스

■ “이성적 판단이 마비된 미국 시스템 흉내내는 게 한국의 상황”

그로부터 1년5개월 뒤. 2008년 9월 전 세계를 휩쓴 글로벌 금융위기는 서비스업이 전체 경제의 80%를 차지하는 ‘미국식 모델이 선진경제’라는 신화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미국식 모델을 강요했던 국제통화기금(IMF)조차 ‘반성문’을 썼다. IMF는 ‘위기로부터 얻은 교훈’이라는 보고서에서 “통제되지 않은 감시체계와 효과적이지 못한 메시지가 맞물리면서 세계 금융시장의 호황 속에 내재된 위험을 제때 알리지 못했다”고 밝혔다.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은 “2008년 이전에도 미국식 모델이 위험하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이 위험성이 증명된 것이 바로 글로벌 금융위기”라며 “주요 20개국(G20) 논의에서 보듯이 미국식 글로벌 스탠더드는 퇴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자유주의는 미국에서 규제완화를 통해 금융위기를 불러온 것은 물론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데이비드 모스 교수가 작성한 그래픽을 보면, 규제가 느슨할 때 상위 1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0%에 육박했다.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이성적인 판단이 마비된 것이 미국 월가의 금융시스템”이라며 “이 시스템을 따라가는 게 마치 선진국이 되는 것인 양 흉내를 내고 있는 게 한국의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금융서비스 산업은 1980년 이후 탈규제를 앞세우는 신자유주의로 무장, 성장해왔다. 거품이 잔뜩 낀 파생상품은 신자유주의 금융시스템이 낳은 대표 상품이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2008년 10월 워싱턴에서 열린 주택위원회 청문회에서 “파생상품 규제에 반대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이 파생상품이 한·미 FTA라는 통로를 타고 한국 시장을 공략하려 하고 있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지난해 12월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의 초청으로 열린 국회 강연회에서 “금융 분야는 FTA를 하면 영향이 많이 있다. 만약 파생상품 같은 것은 이런 것은 규제한다고 명시한 것 외에는 다 허락하는 네거티브 방식”이라며 “파생상품의 특징은 계속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 못하고 거기 적지 않은 것은 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한·미 FTA라는 환상]① 미국 경제시스템은 선진적인가?

[한·미 FTA라는 환상]① 미국 경제시스템은 선진적인가?

■ “파생상품의 위험성은 증명하는 게 어렵다”

외교통상부는 이 같은 우려에 대해 “방어장치가 마련돼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정태인 원장은 “협정상 파생상품 등은 건전성 규제에 의해서만 거부할 수 있는데 만약 상품 한건 한건마다 규제를 하려면 한국 정부가 그 규제의 필요불가결성을 증명해야 한다”며 “하지만 고도의 스와프로 이뤄진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증명하는 게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 ‘블랙 스완(예외적이고 발생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일이 실제 발생하는 것)’의 위험성을 사전에 증명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유종일 교수도 “저축은행 사태에서 나타난 금융감독당국의 독립성과 수준을 보더라도 파생상품을 제대로 규제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제시스템이 선진적이지 않은 것은 비단 금융시스템뿐이 아니다. 우선 미국의 의료시스템은 후진적이다. 미국에서 의료보험 혜택도 없이 사는 사람은 2007년 현재 65세 미만 인구의 17%인 4500만여명에 달한다. 정태인 원장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의료개혁을 하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업이 세계적이라고 해서 복지가 세계적인 것은 아니다”라며 “세계적인 제약회사가 있어도 미국의 약값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편”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또 국민소득 대비 복지지출이 스웨덴,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에 비해 절반 수준이다.

미국의 후진적 경제시스템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소득불평등도 세계 수위권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회원국의 지니계수를 보면 미국은 2000년대 중반 기준으로 0.4를 기록해 한국(0.4), 멕시코(0.56)와 함께 제일 높은 편이었다. 지니계수는 소득 분배의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수치로 0에 가까울수록 소득 분배는 균등하다. 일반적으로 지니계수가 0.4를 넘으면 소득 분배가 상당히 불평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미국 젊은이들이 분노하는 미국 시스템을 도입하려는 한국 정부”

미국의 빈곤율은 지난해 17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 인구통계국은 지난 9월 발표한 2010년 빈곤 보고서에서 “지난해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소득을 벌어들인 가구 비율은 15.1%, 빈곤층은 4620만명이었다”고 밝혔다. 최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the Wall Street)’ 시위도 시장만능주의가 빚어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항의의 목소리다.

정태인 원장은 “미국 젊은이들이 분노하는 미국 시스템을 한국에 직수입하려고 하는 게 한·미 FTA”라며 “서비스 강국, 시장에 서비스를 맡기는 것 등이 우리의 미래인지 짚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위기는 한·미 FTA의 이러한 위험성, 즉 미국의 실패한 경제시스템을 거부할 수 있는 기회였다.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사정변경’에 따라 한·미 FTA를 다시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8년 11월 “한·미 간 협정을 체결한 후에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우리 경제와 금융제도 전반에 관한 점검이 필요한 시기”라며 “한·미 FTA 안에도 해당되는 내용이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고 고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고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미국과의 재협상에서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구를 상당 부분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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