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최후의 만찬, 김재규 망상이 빚은 ‘촌극’ 규정

2018.10.26 06:00 입력 2018.10.26 08:46 수정

신군부가 본 ‘10·26사태 전모’

39년 전 10월26일 1979년 11월7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맨 오른쪽 사진 오른쪽)이 현장검증에서 10·26 당시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총을 쏘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5공 전사>는 18년5개월간의 ‘박정희 체제’를 무너뜨린 당시 사건 현장 약도(왼쪽 사진)를 부록 190쪽에 실었다. 해당 건물(가운데)은 1993년 헐렸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39년 전 10월26일 1979년 11월7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맨 오른쪽 사진 오른쪽)이 현장검증에서 10·26 당시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총을 쏘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5공 전사>는 18년5개월간의 ‘박정희 체제’를 무너뜨린 당시 사건 현장 약도(왼쪽 사진)를 부록 190쪽에 실었다. 해당 건물(가운데)은 1993년 헐렸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5공 전사 속 ‘김재규’

정신분열적 환자가 아니면 철저한 이중성격의 위선자
명석하지 못했고 이재에 밝았다고 이구동성…

39년 전인 1979년 10월26일 오후 7시40분, 청와대 옆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총성이 울렸다. 박정희 유신체제를 붕괴시킨 총소리이자, 전두환 군사정권의 부상으로 이어지는 신호탄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남긴 <제5공화국 전사(前史)>는 이때를 ‘운명의 시각’으로 표현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살된 ‘10·26’의 전말을 신군부의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김재규의 과대망상이 빚은 촌극’이라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수사결과 발표를 따르면서, 박정희 체제가 스스로 불러온 어둠의 결과라고 내비치는 식이다. 5공화국의 정당화를 위해 ‘구체제’로서의 유신을 강하게 비판한 맥락과 통한다. <5공 전사>는 본문 2편에서 ‘10·26사태 전모’를 정리했다. 사건 전후 청와대와 대통령 측근들 사이의 상황, 대통령의 마지막 하루, 궁정동 참사 등을 218쪽에 걸쳐 실었다. 대체로 10·26을 수사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의 ‘국헌문란기도: 박 대통령 시해사건’ 문건과 수사결과 자료를 참고해 기록했다.

‘최후의 만찬’이 시작된 것은 사건 당일 오후 6시5분쯤이었다. 만찬장에는 박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참석했다. 만찬이 시작되자마자 김재규 중정부장은 부산시위 수습 문제로 박 대통령에게 질책을 들었다. 미리 섭외된 여성 2명이 들어오면서 화제는 전환됐다. 김 중정부장은 양주(시바스리갈) 칵테일을 만들다가 잠시 자리를 떴다. 자신이 초청해 다른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김정섭 중정 제2차장보를 만나기 위해서다.

[5공 전사-7화]유신 최후의 만찬, 김재규 망상이 빚은 ‘촌극’ 규정

◆“김재규는 위선자, 차지철 열등의식”…박정희 측근들 악평

오후 7시, 대화가 중정의 ‘신민당 공작’ 건으로 흐르면서 분위기는 더 경색됐다.

“신민당 공기는 어떻소?” 박 대통령의 물음에 김 부장은 “중도파가 강경하게 돌아섰다”며 부정적 상황을 전했다. 이때 차 경호실장이 끼어든다. “그까짓 자식들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전차로 싹 뭉개 버리겠습니다!” <5공 전사>는 차 실장의 발언이 ‘충성심을 과시’하는 것이었다고 썼다. 박 대통령이 이어 신민당 김영삼 총재 기소를 언급할 때도 김 부장은 “이중처벌은 곤란하다”는 뜻을 피력했다. “정보부가 그렇게 약해서 되겠냐. 죄가 있으면 딱딱 해치워야지 비행 서류만 가지고 있으면 무얼하나.” 박 대통령의 질책. 이어 차 실장의 강경 발언이 이어졌다.

김 부장은 다시 자리를 떴다. 그 길로 안가 본관 2층 침실 금고에서 권총을 꺼냈다. 뒤이어 부하인 박선호 의전과장과 박흥주 비서관에게 “오늘 내가 해치우겠으니 총성이 나면 너희들은 경호원들을 처치하라”고 지시한다. “똑똑한 놈 3명만 골라 나를 지원하라. 다 해치우겠다.” 거듭 지시한 후 그는 만찬장으로 돌아갔다. 만찬장에선 여성 가수가 기타를 치며 부르는 ‘눈물 젖은 두만강’이 흐르고 있었다.

김 부장이 품속의 권총을 빼든 것은 오후 7시40분쯤이다. 앉은 자세로 차 실장에게 1발을 쏘고, 일어서면서 박 대통령에게 1발을 쐈다. 재장전하려 했지만 권총이 고장났다. 그는 일단 급히 현장을 떴다. 총성이 울리기 전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논란이 있다.

<5공 전사>는 이때 김 부장이 차 실장을 향해 “각하 이따위 버러지 같은 자식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발표한 수사결과대로다. 하지만 후일 동석한 여성 중 한 명은 “그런 발언은 없었다”고 밝혔다.

<5공 전사>는 오른쪽 팔목에 관통상을 입은 차 실장, 김 실장이 총에 맞은 대통령을 두고 피신한 것과 관련, “죽음 앞엔 평소에 견마지로의 충성을 맹세하던 경호실장과 비서실장도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라고 적고 있다.

연회석의 총성은 아직 멎지 않았다. 고장난 총을 들고 뛰쳐나간 김 부장은 부하의 총으로 바꿔 돌아온다. 이어 피신했던 차 실장에게 다시 발사하고, 탁자에 구부리고 있던 박 대통령의 머리에도 1발을 재차 쏜 뒤 현장을 떠난다. 이때가 오후 7시43분이다. 18년5개월간 이어졌던 ‘박정희 통치’ 시대는 그렇게 예고 없이, 하룻저녁에 끝났다.

신군부의 관점이 드러나는 대목은 사건의 원인과 인물평가 부분이다. <5공 전사>는 10·26을 ‘대통령을 살해하고 이를 혁명으로 이끌려 했던 김재규의 과대망상이 빚은 촌극’으로 규정한다.

사건 수사를 지휘한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허욕이 빚은 내란목적의 살인사건”, “대통령으로는 자기가 가장 적임자라는 망상에 사로잡혀…사후 혁명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저지른 일이라고 발표한 수사결과를 요약한 문장으로 보인다.

다만 무엇이 박 대통령을 비극적 최후로 이끌었는가에 대한 해석을 덧붙인 것이 눈에 띈다. <5공 전사>는 박 대통령이 측근세력의 ‘분할을 통한 통치’를 추구하면서 “결국 경호실장으로 대통령의 개인참모를 자처했던 차지철과 중앙부장 김재규 간의 알력을 심화시켜 경호실장에 대한 증오가 대통령에게까지 미쳐, 동료였으며 가장 믿던 측근의 한 사람인 김재규가 박 대통령에게 총부리를 돌리는 엄청난 역사적 사건을 야기시켰다”고 해석했다.

박 대통령이 차 실장을 지나치게 신임한 점도 문제 삼는다. “경호실장 차지철의 단편적이고 편견 섞인 건의를 받아들여 필연적으로 중앙부장과 경호실장 간의 반목질시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해 10월 대규모로 벌어진 부마 민주항쟁도 이유 중 하나로 든다. 부마 민주항쟁 수습 문제를 두고 “차지철과 김재규가 의견차 다툼 끝에 대통령을 살해하기에 이르는 10·26과 연결돼 한국 근대사의 한 시대를 마무리짓는 분수령이 됐다”고 평가한다.

부마 민주항쟁에는 “불순배후조직이 직접적으로 개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고도 적었다. ‘박정희 체제’ 이후 5공화국이 들어선 것을 ‘필연적 과정’으로 그리고자 한 만큼, 박 대통령 통치의 암흑이 이윽고 그를 덮친 것이라는 해석을 덧붙인 것으로도 풀이된다.

김 부장, 차 실장, 김 실장 등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에 대해선 별도의 인물평을 곳곳에 기록했다. 군부 인사들의 평가를 더한 대부분이 ‘악평’이다.

김 부장을 “정신분열적 환자가 아니면 철저한 이중성격의 위선자” “참모들은 김재규가 명석하지 못했고 이재에 밝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이라고 적었다. 김 부장이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박 대통령 살해 목적을 ‘유신체제 종식, 민주주의 회복’이라고 밝힌 데 대해서도 “긴급조치 10호를 건의한 자가 민주회복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썼다.

차 실장과 김 실장에 대한 평가도 박하다. 차 실장은 “박 대통령을 독재자이며 강경하고 자비심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 “국민과 대통령의 거리를 점점 멀어지게 만들어” “군의 간부로서 차 실장을 상관으로 모신 많은 사람들이 차지철을 굉장한 열등의식을 가진 인물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김 실장도 “경력, 두뇌의 명석도, 활동력, 통솔력 등 어느 면으로 보나 비서실장으로 부적격”이라며 ‘무능력자’로 묘사했다.

두 군사독재정권이 지고 또 뜨는 시발점이 된 궁정동 안가 현장은 지금 기억에만 남아 있다. 1993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궁정동 안가들을 철거하고 공원을 조성토록 했다. 10·26 당시 연회석이 있던 안가 ‘나동’도 그때 헐렸다.

◆1~2편에선 500쪽 걸쳐 유신체제 신랄 비판 박정희 죽은 뒤엔 ‘초인간적’ 영웅 묘사

[5공 전사-7화]유신 최후의 만찬, 김재규 망상이 빚은 ‘촌극’ 규정


‘가장 한국적인 서민’ ‘초인간적 의지와 근면성을 지닌 지도자’ ‘신념에 찬 행동인’….

전두환 정권의 <제5공화국 전사>가 완성된 시점은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2년6개월 뒤인 1982년 5월이다. 신군부는 박 전 대통령 사후 그의 인생을 위인전식 수사를 동원해 묘사했다. <5공 전사> 앞부분에서 5공화국 정당화를 위해 유신체제를 강력 비판한 것과는 결이 다르다. 집필 당시까지 남아 있던 추모 분위기, 10·26 수사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직접 지휘했다는 점 등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5공 전사> 본문 2편은 10·26을 다루면서 7쪽 분량으로 박 전 대통령의 인생사를 정리했다. 첫 문장을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고령 박씨 29대손”이라는 설명으로 시작해 “가난한 촌부의 아들로 태어나 벽촌에서 자랐고, 근대사의 격동기를 거쳐왔지만, 누구보다도 불행한 현실을 박차고 웅비하려는 기상이 넘쳤던 한 인간”이라고 썼다.

성품과 지도력에 대한 기술은 영웅 서사를 방불케 한다. 편찬자들은 “박 대통령은 냉철하고 불과 같은 행동력을 가진, 자상하고도 대범한 서민정치가 등 다면성을 갖춘 ‘인간’이었다”며 “시골학교 선생님과 같은 자상함이 있었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결코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이 엿보였다”고 썼다. 길을 비키지 않는 황소에게 “나를 몰라봐? 내가 너희 황소당(공화당) 총재야”라고 한 것 등 세 가지 일화를 소개하며 ‘서민적 해학’ ‘남다른 유머 감각’을 강조하기도 했다.

18년5개월이라는 재임기 치적은 ‘신앙과 신념의 지도자’라는 말로 정리했다. “근대화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앙과 남북통일에 대한 신념은 18년 동안 시종이 여일했다”고 했다. “업적 또한 유난히 뚜렷하였다”며 ‘경제자립’ ‘자주국방’ ‘새마을운동’ ‘남북대화’ 추진 등을 근거로 들었다. 본문 1~2편에서 500쪽에 걸쳐 유신체제를 분석하며 신랄하게 비판했던 데 비춰보면 후한 평가다. 다만 일대기를 정리하면서도 <5공 전사>는 “집권 말기에 그가 범한 우는 유신체제를 구축하여 ‘정치 부재’ ‘행정력 지상’ 현상을 초래하게 한 데 덧붙여 측근에서 그를 보좌하는 참모들의 인선에 실패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다”고 짤막한 비판을 달았다.



※특별취재팀 (기자)

배명재·강현석·유정인·조형국

※자문위원단 (교수·가나다순)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노영기 (조선대 기초교육대학)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한정훈 (서울대 국제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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