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작은 것들’의 재미를 찾아서

2014.01.01 20:46
김작가 | 대중문화평론가

2013년 마지막 날을 제주에서 보냈다. 지난해 6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협재해수욕장 인근 게스트하우스에서 진행해온 콘서트 때문이다. 보사노바 뮤지션인 나희경, 들국화의 최성원, 모던록 밴드 언니네 이발관이 무대에 올랐다. 아니, 노래하고 기타를 들었다는 표현이 맞겠다. 게스트하우스 거실에서 마이크도, 앰프도 없이 진행되는 공연이니 말이다.

[문화와 삶]다시 ‘작은 것들’의 재미를 찾아서

‘최대한의 침묵’을 요구한 나희경은 스탠드 조명 하나에 의존해서 나긋나긋하되 작디작은 목소리로 보사노바곡들을 불렀다. 객석의 숨소리마저 소음으로 느껴질 만큼 밀도 높은 시간이었다. ‘제주도의 푸른 밤’을 기타 연주곡으로 들려주며 공연을 시작한 최성원은 어떤날의 ‘그런 날에는’과 조동익의 ‘함께 떠날까요’를 마치 한 노래인 듯 붙여 불렀다. 언니네 이발관의 ‘2002년의 시간들’이 공연의 대미를 장식했다. 안녕하지만은 않았던 2013년, 적어도 마지막 날만큼은 충분히 안녕했다고 믿고 싶다.

‘큰 것’에 집착한 시기가 있었다. 압도적 규모의 외국 페스티벌은 경이로웠고, 스타디움을 가득 채우는 공연은 동경 그 자체였다. 티라노사우루스, 울트라사우르스 같은 거대 공룡 이름을 외우며 어떤 공룡이 더 큰지를 친구들과 다투던 어린 시절의 심리에서 비롯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화는 공룡과 달랐다. 자연의 선택과 진화의 신비가 공룡의 크기를 결정하지만 현대 대중문화에서 거대함은 투입 자본에 정비례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치보다는 이익을 추구하는 대자본의 속성은 이상의 영역에 있는 것들을 현실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형태를 바꾸고 본질을 흐트러뜨리곤 했다. 당연하다. ‘로망’과 ‘비즈니스’는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거대 문화 상품들이 한국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게 당연한 걸 몰랐다. 순진했다. 그렇다고 딱히 실망하거나 분노하지는 않았다. 그저 재미가 없어졌을 뿐이다.

다른 쪽으로 시선이 가기 시작한 건, 제주도를 알고 나서부터였다. 2011년 초 생전 처음 그 섬에 발을 들이자마자 흠뻑 빠져 한 달에 한 번꼴로 비행기를 탔다. 아득한 수평선에 눈은 시원했다. 바람소리를 제외하면 절대적 정적에 가까운 공기에 귀는 편했다. 불필요한 정보들로 가득한 주변의 통화소리 안에서 살아갈 때는 닿지 못했던 세계였다. 무엇보다, 경쟁과 숫자를 피해 내려온 사람들이 집을 짓고 서로 서로 어울리며 관계망을 형성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새로운 문화적 경험이었다. 그렇게 제주도는 나에게 관광지를 넘어 여행지가, 여행지를 넘어 다른 일상의 공간이 됐다. 딱히 무슨 논리적 인과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그즈음부터 ‘작은 것’들이 좋아졌다. 십수명의 사람들이 오가는 술자리보다는 오붓하되 지속적인 자리를 더 자주 찾게 됐고, 숨 쉴 틈 없이 꽉 찬 공연장보다는 맥주 한 병 들고 여유있게 보는 공연들을 선택한다. 생각해보면 90년대 중반 발아하기 시작한 홍대앞 인디 신에 녹아들게 된 이유 역시 그 날것의 에너지와 공동체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시스템도, 비즈니스도 낯선 단어였던 시절이었다. 나이를 먹으며 에너지와 분위기보다 숫자와 크기를 들여다보다가 다시 원점 비슷한 곳으로 돌아가게 된 셈이다.

마흔이 됐다. 서른이 됐을 때는 십년 후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희미하지만 짐작은 된다. 힘들 것이다.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지하기 위해서 돈도 계속 벌어야 할 것이다. 건강 역시 30대와는 다를 것이다.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 할 것들이 더 많은 단계가 됐다고 생각하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큰 위안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게 있다. 작은 것들에 더 집중하려 한다. 하나의 큰 것보다는 수백개의 작은 것이 발아하고 자라나는 문화 생태계를 지향하려고 한다. 어른이 된 후 늘 재미를 추구하며 살았다. 앞으로도 그 재미를 지키고 싶다. 작은 것들이 재미의 엔진을 돌리는 휘발유가 될 것이다. ‘나’와 ‘우리’를 느낄 수 있는 작은 것들이.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