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 망령과 민주주의의 살길

2016.10.17 21:01 입력 2016.10.17 21:04 수정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지금 한국 사회는 다시 ‘우파의 망령’과 마주치고 있다. 아니 ‘망령’이 난 우파와 맞부딪치고 있다고 거칠게 표현할 만도 하다. 박정희 체제의 부활, 유신 공안정치의 작동, 극우세력의 동원 등. 하지만 아무리 정치적 희화화를 한들 문제는, 그들이 이 사회의 실존하는 정치세력이라는 점이다. 나아가 단단한 사회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기초는 ‘야당’인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이 땅 민초의 생활고와 노동빈곤층의 문제, 부의 양극화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그리고 좌파세력은 그들을 넘는 대안으로 부상하지 못하면서 더욱 단단해져가고 있다.

[세상읽기]우파 망령과 민주주의의 살길

그렇기 때문에 일부 가족 명칭의 우익 단체들과 사이버 세상의 ‘일베’들을 ‘일베충’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조롱하고 그들을 매우 비이성적인 집단, 사회병리적인 현상으로 치부하는 태도는 정치적 한풀이는 될지언정 충분하지 않다. 설사 그런 측면이 있다고 해도, 그들을 ‘비정상’ ‘병리’로 취급해서 과연 어떤 유의미한 분석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해서 질문은 민주화 이후의 사회체제를 향해야 한다. 어쩌면 신자유주의를 민주화로 이해했던 반대편의 극단이 우파적 사고를 부채질한 게 아닐까. 이 땅의 민주주의세력을 대표한다고 했던 자유주의 집권세력이 시도한 신자유주의적 자유화가 만들어낸 것이 바로 ‘하향평준화’가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극우의 표상으로 간주되는 이른바 ‘일베’들이 민주화를 획일화 혹은 하향평준화로 정의한다고 했을 때, 단지 그들을 비판할 수만은 없다고 여겨진다. 이 땅의 좁은 자유주의가 ‘닥치고’와 ‘묻지마’와 ‘쫄지마’를 외치며 끌어갔던, 민주화 이후 몇 차례의 선거 캠페인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1987년 이후 선거 민주주의자들은 민주 대 반민주의 이분법적 도식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 앙상한 이념, 옹졸한 자유주의만을 계속 들이댔다. 심지어 정치적 민주주의조차 제도화하는 데 실패한 민주주의였다. 그것이 획일화 혹은 하향평준화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정치적 이념의 폭력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가운데 노동은 철저히 배제됐고, 노동의 시민권은 ‘민주정부’라는 김대중 정부에서도 여전히 짓밟혔으며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은 경제자유화라는 이름으로 미화됐다.

그 결과, 한국은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가 됐다. 지난 3월 발표된 국제통화기금의 ‘아시아 불평등 분석 보고서’의 결론이 그렇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소득 최상위 10%가 평균 가정에 비해 4.5배나 많은 소득을 올려 아시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이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아시아에서 상대적으로 평등한 나라였다. 그런데 1995년 대반전이 시작된다. 1995년부터 2013년까지 일관되게 개인소득의 불평등, 즉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됐다. 이 기간은 김대중·노무현 자유주의 정부 10년과 이명박·박근혜 우파정부 집권기에 걸쳐 있다. 보수우파 정부에서 더 심화됐느니 어떠니 해도, 그 전체적인 방향을 잡은 것은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이고, 노무현 정부는 그것을 계승했으며, 이명박근혜 정부는 그것을 극단적인 형태로 완성하는 중이다.

민주화에 대한 극우 일베의 정의는 결국 지난 29년간의 ‘민주화’가 만들어낸 결과다. 그 과정 속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은 깊어지고,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조롱은 함께 커나갔다. 그러므로 이제 그 민주화가 아닌 다른 민주화, 그 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그리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꿈꿀 때가 되지 않았는가 싶다.

이제 민주주의에 대한 의제적인 전제 속에서 현실에 대한 원망과 기대를 버무리는 헛된 담론은 집어치우고 현존하는 민주주의에 대해 직시할 때이다. 그것이 바로 일베식 우파의 민주화 정의를 실천적으로 벗어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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