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접촉은 ‘신 포도’일까

2016.10.24 21:00 입력 2016.10.24 21:04 수정
황재옥 | 평화협력원 부원장

이솝우화에 ‘여우와 신 포도’ 얘기가 있다. 어느 날 굶주린 여우가 포도가 먹고 싶어 포도밭으로 숨어들었다. 맛있어 보이는 포도송이가 높은 곳에 매달려 있었다. 여우는 어떻게든 거기에 닿아보려고 했지만 모두 헛일이었다. 지친 여우는 포도밭을 떠나면서 중얼거렸다. “아무나 딸 테면 따라지, 따봤자 저건 신 포도야.” 자기의 실패나 착오를 솔직히 인정하지 않고 구차하게 변명하는 사람들을 비판할 때 빗대 쓰는 얘기다.

[세상읽기]북·미 접촉은 ‘신 포도’일까

지난 21~2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북·미가 ‘1.5트랙’ 접촉을 가졌다. 비슷한 시기인 20일까지 워싱턴에서는 ‘한·미 2+2(외교+국방장관) 회담’과 ‘한·미 안보협의회의(SCM)’가 연달아 열렸다. 워싱턴에서는 주로 대북 압박과 제재 문제가 논의됐기 때문에 쿠알라룸푸르에서 북·미 간에는 무슨 얘기가 오갈까 관심이 쏠렸다. 우리 언론의 관심이 쏠리자 외교부는 “민간 차원의 접촉이라서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다소 평가절하하는 설명을 내놓았다. “북한 관리들이 미국 민간인들을 만난 걸 보면 북한이 그만큼 국제적으로 고립돼 있는 증거”라는 설명까지 곁들였다. 과연 그럴까? 외교부의 설명이 혹시라도 여우가 따먹지 못한 포도를 ‘신 포도’라고 딱지 붙인 것과 같은 심리의 발로는 아닐까?

그동안의 보도나 기록을 보면, 북·미 간에는 반관반민을 뜻하는 1.5트랙 접촉이나 회담이 열린 적이 제법 있었다. 학술회의로 시작해서 학술회의로 끝난 경우도 있고 1회성 접촉으로 끝난 경우도 있다. 그러나 1.5트랙 접촉이 본격적인 북·미 당국회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경우가 적지 않다. 필자가 이번 쿠알라룸푸르 북·미 접촉을 예사롭지 않게 보는 이유다. 지난 9월9일 북한이 5차 핵실험까지 성공하자 미국 내 싱크탱크들과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같은 유수 언론들은 버락 오바마 정부의 북핵정책이 북핵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북핵능력의 고도화를 초래했다고 평가했다. 결국 대화와 협상으로 북핵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물론 미국 내에서 선제타격론이 나오기도 했지만, 북한의 5차 핵실험 후 대화와 협상론이 주류로 등장하고 있다. 미국 대외정책에 영향력이 큰 미 외교협회(CFR)가 9월18일 회의에서 대화와 협상을 권고한 뒤인 9월23일,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북핵 동결을 전제로 한 대화’를 언급한 것은 이런 흐름의 반영이다.

이렇게 변화가 예고되는 시점에 1.5트랙일망정 북·미 접촉이 성사됐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북한은 원래 민간영역이 없고 모든 걸 당국자들이 나설 수밖에 없는 국가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미국 측 대표들의 경력이나 위상이다. 로버트 갈루치는 1994년 10월21일, 미국 측 수석대표로서 ‘미·북 제네바 기본합의’를 성사시킨 사람이다. 조지프 디트라니는 북핵 6자회담 차석대표로서 2005년 9·19공동성명을 성사시킨 사람이다. 아마도 북한은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을 내다보고 미국 새 정부에 자기들의 메시지를 미리 전달해놓기 위해서 자기들과 인연도 있는 미국 내 북한통들을 불러낸 것이 아닌가 싶다. 클린턴이 그들에게 비공식 특사 역할을 위임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길 없지만, 빌 클린턴 정부 시절 대북통들의 조언이나 권고가 미국 새 정부의 대북정책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는 ‘신 포도’론으로 버티지 말고 미 신정부의 대북정책 변화 가능성과 그 방향에 미리 대처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이번 워싱턴 한·미 회담에서처럼 대북 압박과 제재 타령만 하다가 내년 하반기부터는 본격화될 미국의 대북정책 방향 선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내년에는 우리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시기지만, 북핵문제 같은 중차대한 안보문제는 정권을 초월해 대처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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