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술집

2016.11.24 20:29 입력 2016.11.24 20:35 수정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선술집

예전, 동네 막걸리 파는 가게에 술심부름 가면 어른 서넛이 서 있었다. 무얼 하는가 보면, 턱밑 수염을 허옇게 물들이는 일이었다. 막걸리 술추렴이란 뜻이다. 따로 술청이 있는 집이 아니어서 그냥 서서들 마셨다. 안주를 제대로 먹는 것도 못 봤다. 주인네가 내주는 김치 쪼가리나 두부 같은 거였다고 기억한다. 이런 집을 흔히 실비집이니 선술집이라고 불렀다. 실비는 설이 여럿이나 실비(實費), 즉 싸게 낸다는 뜻이고 선술집 역시 ‘선’ 채로 마신다는 의미다. 유리창에 빨간 페인트로 실비집이라로 쓴 걸 보곤 했다. 임대료가 올라가고, ‘인건비’와 재료비가 올라가서인지 이제 이런 술집은 명맥을 잇기도 어렵다. 심지어 전국에 남아 있는 선술집을 찾는 탐방단이 있을 정도니까(나도 그중의 일원이다).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선술집

선술집은 원래 우리 술 문화 중의 하나였다. 주로 거친 일에 종사하는 막노동자들의 주점으로 선술집이 있었다. 일하다가 탁주 한 잔 마실 수 있었다. 왕대포라는 말이 원래 커다란 바가지라는 뜻이다. 장터나 도시 뒷골목에서 서서 먹는 집이 많았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더 퍼져나갔다. 일본에서 다치노미야, 즉 ‘서서 마시는 술집’ 문화도 함께 상륙했기 때문이다. 선술집은 유럽에도 아주 흔하다. 동네 ‘바’에서는 대낮부터 서서 와인이나 독한 술 한 잔을 마시는 사람들이 많다. 스탠드바라는 술집의 원형이 바로 이것이다. 문자 그대로 스탠드, 서서 마시는 것이다.

일본 기타큐슈는 규슈의 최북동단에 있는 도시다. 부산에서 아주 가깝다. 전형적인 공업도시다. 주머니 가벼운 노동자들이 많이 산다. 이들이 고된 노동을 씻어내고 한잔 가볍게 할 수 있는 술집이 번성했다. 정식 술집도 있지만, 주류판매상 한쪽에서 가볍게 서서 마시는 문화로 발전했다. 이를 ‘가쿠우치’라고 부른다. 현재 인구 100만명의 이 도시에서 가쿠우치라고 부르는 집이 150곳이 넘는다고 한다. 술이 아주 싸고 안주도 대개 낱개로 포장된 싸구려 건어물이나 땅콩, 여러 가지 통조림을 그대로 따서 먹는다. 일본은 이런 문화를 잘 포장하고 열심히 홍보한다. 선술집 문화를 그리워하는 한국인 관광객에게도 크게 어필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선술집 문화가 아직은 남아 있다. 얼마 전에 광주 양동시장에 들렀더니 함평왕대포라는 막걸리집에서 서서 마시는 노인들이 보였다. 여수에도 교동시장 한쪽에 남면집이라는 선술집이 있었다. 안주를 안 시켜도 그만, 시키면 손맛 살아 있는 수수한 요리가 나온다. 구례에는 동아식당이라고 전설적인 선술집이 있다. 외지인들이 많이 오지만, 여전히 현지 노동자들이 선 채로 막걸리 한 잔에 공짜로 주는 김치와 두부를 먹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난한 이들의 보금자리 같은 선술집 문화, 올라가는 가겟세로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서울 같은 대도시가 서글퍼질 뿐이다. 주말에 또 대형 촛불집회가 열린다. 잠시 짬을 내어 종묘 순라길 쪽으로 가보시라. 노인들이 주 손님을 이루는 선술집이 서넛 있다. 아마도 서울의 마지막 선술집 타운이 아닐까 싶다. 거기서 저와 조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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