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 상놈 되기

2018.09.06 20:28 입력 2018.09.06 20:36 수정

<여유당전서>에서 정약용은 자신의 소망을 털어놓는다. “내가 바라는 바는 온 나라를 양반 되게 하여 온 나라에 양반 없게 하는 것이다.” 정약용이 정말 온 나라 양반 되기를 바랐는지 학자들 사이에서 말이 많다. 아리송한 다음 말이 논란을 부추긴다. “천한 자가 있어야 귀한 자가 드러나는 것인데, 만일 다 존귀하다면 이는 곧 존귀한 사람이 따로 없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정약용이 온 나라 양반 되기를 바라긴 했지만 당시 양반답지 않은 자들의 행세를 비판했을 뿐이라고 해석한다. 실제로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관작이 없는 자도 스스로 귀족이라 칭하고 군역과 요역을 면하는 바람에 나라가 가난해지는 폐단이 벌어지고 있다며 당대 온 나라 양반 되기를 질타한다.

[세상읽기]온 나라 상놈 되기

김상준 교수는 ‘온 나라 양반 되기’란 논문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양반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를 문화적으로 설명한다. 양반은 관직의 획득과 혼인을 통해 되는데 이는 꼭 사전에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 현실에서 양반으로 대접받으려면 해당 가문이 유교적 예법 실천과 학문 수련을 통해 지역 사회에서 어느 정도 사회적 평판을 획득해야만 한다. 조선 후기에 양반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양인들이 양반 신분으로 행세하기 위해 양반들이 독점하고 있던 유교적 예법과 학문 수련을 모방하면서 평등화 현상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신분 자체에 대한 냉소, 회의, 부정이 증가하면서 반(反)신분적 평등화가 싹텄다.

이러한 설명을 입증이라도 하듯 일제강점기에도 족보와 문집 발행 등을 통해 양반이 되려는 사람들이 대폭 늘어났다. 하지만 온 나라 양반 되기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다. 이혜령 교수는 ‘양반은 말해질 수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일제강점기 상놈이 양반 되는 것을 양반들이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양반들은 “상놈의 자식이 글을 배워 알게 되면 양반의 세력이 없어질 터이니 미리 예방”하기 위해 지역에 야학이 개설되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 향촌사회에 상놈이 양반 되지 못하게 하는 운동이 광범하게 벌어졌다. 상놈이 학문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

한때 누구나 대학 가면 계층 상승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사실 학벌의 획득을 통해 부를 축적하려는 시도는 근대 한국의 온 나라 양반 되기의 주된 형태였다. 이제 이런 희망은 무참히 꺾이고 있다. 대학 나와도 좋은 직장을 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령인구가 줄어들자 대학위기론이 힘을 받고 있다. 서울의 몇 개 대학만 학문하는 곳으로 놔두고 나머지는 모조리 취업훈련소로 만들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특히 지방대에는 어차피 학문할 사람도 없으니 아예 취업사관학교로 개편하자고 한다. 이광수가 <흙>에서 “서울 양반”과 “시골 상놈”이라 대비해서 불렀던 양극화 현상이 조만간 광범하게 실현될 태세다.

지금 지방대생은 저임금과 장시간의 탈숙련된 단순 반복 노동, 그것도 비정규직과 파견직으로 가득 찬 지방의 열악한 노동시장에 최적화된 존재로 키워지고 있다. 사회에 온전히 참여하여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원천적으로 박탈당한 상놈으로 전락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지방대는 취업 교육에 몰두하고 있다. 취업률 지표로 대학의 생존 여부가 결판나는 지금 모두 단기 이윤을 내라는 경영 언어에 휘둘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은 ‘인서울’ 대학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 양반이 상놈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김문용 교수는 ‘정약용의 변등론과 유교 사회윤리의 확장 가능성’이란 논문에서 정약용의 진짜 걱정은 다른 데 있었다고 말한다. “온 나라가 다 귀해지면 누가 천한 일을 맡아서 할까?” 미국에서 노예제를 반대하던 백인들이 하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노예가 해방되어 모두 자유인이 되면 그들이 맡아 하던 천한 일을 누가 대신할까? 하지만 온 나라 상놈 되는 상황을 우울히 지켜보고 있는 나는 다른 걱정을 한다. 생존 문제에 몰두하느라 모두 학문에 뜻을 두지 못한다. 이러다가 “온 나라가 다 천해지면 누가 귀한 일을 맡아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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