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다시 싸우기 위하여

2023.03.13 03:00 입력 2023.03.13 03:06 수정

격투 경기에는 늘 패자가 있다. 아니라면 승자도 없을 것이다. 승자에게만 마이크를 쥐여주는 대회를 나는 보지 않는다. 격투기의 본질은 때때로 패자의 인터뷰에서 더욱 생생히 읽힌다. 1년 전 국제격투기 대회인 UFC에서 볼카노프스키에게 패배한 정찬성은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말했다.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고. 나는 챔피언이 될 수 없다고 느낀다고. 계속하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면서 그는 말끝을 흐렸다. 그의 몸은 피와 땀과 눈물로 뒤덮여 있었다. 세계적인 파이터도 어떤 싸움 뒤에는 그토록 정직하게 약해진다. 그러나 정찬성의 흔들리는 동공을 나는 용감무쌍한 자의 눈빛으로 기억한다. 고통의 깊숙한 안쪽으로 자신을 밀어붙이며 수련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헤엄출판사 대표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헤엄출판사 대표

이긴 선수뿐 아니라 진 선수까지 존경할 때, 부디 꺾이지 말고 다시 링 위로 돌아와달라고 응원할 때, 격투기라는 스포츠를 향한 마음은 깊어진다.

지난달에는 한·일전이 있었다. 국내 격투기 단체 블랙컴뱃에서 주최한 대회였다. 모든 경기가 놀라웠지만 이 지면에 남기고 싶은 건 비교적 자리가 좁은 여성부 아톰급 경기다. 아톰급은 종합격투기에서 가장 낮은 체급이며 약 48㎏ 이하의 선수들을 지칭한다. 한국에서는 스물두 살인 홍예린 선수가 출전했다. 홍예린은 목소리가 작고 말수가 적은 파이터지만 숨길 수 없이 비범한 기운을 지녔다. 고요하게 살벌한 얼굴로 웃음기 없이 싸우는 타격가다. 한편 일본에서는 스물여덟 살 오시마 사오리 선수가 출전했다. 화분 가게 주인처럼 상냥하고 부드러운 모습의 사오리는 두 아이 엄마다. 동시에 20년간 유도를 해온 베테랑이자 무려 두 체급에서 챔피언을 거둔 MMA 최강자다. 경력 면에서 사오리는 홍예린을 압도한다. 자신의 역량을 훌쩍 뛰어넘는 적수와 맞붙기 위해 홍예린은 모든 것을 걸고 싸움을 준비했을 것이다.

“이 경기가 끝”에 모두가 숨죽여

둘의 경기는 타격가 대 그래플러의 만남이었다. 홍예린이 빠르고 강력한 복싱으로 주먹을 꽂아 상대에게 데미지를 입힌다면, 사오리의 주특기는 그래플링이다. 상대를 붙잡아서 메치거나 비틀고 꺾고 조르는 레슬링과 주짓수와 유도가 그가 쓰는 기술의 뿌리를 이룬다. 사오리에게 잘못 붙잡히면 끝장이라는 뜻이다.

지지 않기 위해 홍예린은 붙잡히는 걸 필사적으로 피해야 했다. 서서 싸울 때 훨씬 유리하니까. 그러나 사오리는 기어코 그를 붙잡아 바닥으로 데려온다. 두 사람은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싸운다.

홍예린의 방어 실력은 예상을 웃돌게 뛰어나고 유연했으나, 마지막 라운드에서 사오리의 암바 기술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더 많이 싸워온 사오리가 승리를 거둔다. 양쪽 다 완전히 지친 채로 경기가 끝났다.

승자의 인터뷰에서 사오리는 자신보다 다섯 살 어린 홍예린에게 낭랑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번에는 당신이 졌지만 준비가 되면 리벤지해주세요. 저는 그 신청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같이 힘내봅시다.” 그러나 홍예린은 패자의 인터뷰에서 나지막이 고백한다. “이 경기가 마지막일 것 같습니다.” 격투기를 계속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듯하다. 홍예린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관중들은 숨 죽인 채로 그를 본다. 홍예린의 키에 맞게 자기 무릎을 낮춰 마이크를 대주던 사려 깊은 진행자도 섣불리 사정을 캐묻지 않는다. 격투기가 싫어서 관두는 것이 아님을 모두가 직감한다.

사오리 역시 상대의 은퇴 소식을 듣는다. 그러자 사오리는 눈가가 시뻘게지도록 운다. 그는 아는 것이다. 격투기를 원해도 계속할 수 없는 선수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정중히 인사한다. “저를 은퇴 시합 상대로 골라줘서 고마웠습니다.” 그것은 적을 아끼는 마음이다.

이기기 위해 연구하다가 너무 잘 알아버렸기 때문에, 함께 힘껏 뒤엉켜보았기 때문에 사오리는 홍예린이라는 적을 아끼지 않을 수 없다.

블랙컴뱃의 대표 검정은 홍예린을 대신해 사오리에게 정중히 말한다. “한국에는 정말 강력한 여성부 선수들이 많이 있습니다. (…) 복수하러 갈 테니까 기다려주세요.”

‘복수에 담긴 존경’ 격투기서 배워

그러자 내 안에서 ‘복수’라는 단어가 새로워진다. 여기서의 복수는 당신을 잊지 않겠다는, 당신에게 견줄 만큼 내가 훌륭해지겠다는, 그때까지 당신이 그 자리에서 건재하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격투기는 상대를 아프게 하는 스포츠지만 상대가 완전히 망가지기를 바라는 격투 선수는 없다. 그건 다시는 싸울 수 없다는 의미니까.

그렇게 싸워놓고도 서로의 평안을 진심으로 염원하는 두 선수를 본다. 상대가 무탈하길 가장 바라는 이들이 있다면 바로 적들일 것이다. 어떤 시공간에서는 폭력과 사랑이 충돌하지 않는다. 복수에 한없는 존경을 담을 수도 있음을 격투기 판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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