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서비스 일자리와 기본권

2017.02.19 20:20 입력 2017.02.19 20:27 수정
이진석 | 서울대 의대 교수

몇 해 전, 지방에 있는 정신요양시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일행과 함께 식당에 들렀다. 식당에서는 직원들이 분주하게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의 한 분이 시설에 거주하면서 아르바이트로 식당 일을 거들고 있는 만성 정신질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견 보기에도 너무나 멀쩡한 분이었다. 동행했던 정신과 전문의가 그 환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 “지금 바로 퇴원해도 되는 상태인데, 왜 시설에 머물고 있나?”라고 물었다. 환자의 대답은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50대 여성인 그 환자는 30대 초반에 정신질환이 발병했는데, 외래진료를 두세 차례 받은 후, 바로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그 후 근 20여년을 정신요양시설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사이에 자신을 돌봐주던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그 후로는 형제자매의 연락도 끊겼다고 한다. 아마도 이 환자는 수십년의 여생을 그 시설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이 환자에게는 지금 머물고 있는 시설이 세상의 전부이다.

[정동칼럼]공공서비스 일자리와 기본권

이 환자가 정신질환을 앓게 된 것을 사회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20여년의 삶이 정신병원과 시설에 격리된 것은 사회의 탓이 크다. 약간의 돌봄만 주어졌더라면, 이 환자는 지역사회에서 가족, 이웃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각 지자체마다 정신질환자들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정신건강증진센터가 있다. 그러나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직원 한 명이 100여명의 환자를 돌봐야 한다. 그런데 이 직원들이 정신질환자들을 돌보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는 200~300명에 가까운 환자를 돌보는 셈이다. 환자 개개인에게 제대로 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기가 힘들다. 시설에서 만났던 환자가 “세상에 나가서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다. 이곳에 있는 것이 편하다”고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선진국은 정신질환자들이 지역사회에서 가족,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권리로 보장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직원 한 명이 통상 20~30명의 환자를 전담해서 돌보고, 집중관리가 필요한 경우에는 10명 내외의 환자를 돌본다. 우리나라에 비해 거의 10배의 인력 규모이다. 이렇게 집중적인 돌봄 서비스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정말 심각한 상태의 환자만 아니라면,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가 선진국 수준으로 정신질환자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들을 돌볼 공공서비스 인력을 더 늘리면 된다. 그렇게 하면, 더 이상 수많은 정신질환자들을 정신병원과 시설에 가둬놓지 않아도 된다.

최근 한 유력 대권주자의 공공부문 일자리 확충 정책을 놓고, 공무원 공화국 만들 일 있냐는 비난부터 막대한 재정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에 대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설왕설래 말이 많다. 그러나 공공서비스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우리 사회의 숱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절박한 국가적 과제이다.

소방관과 경찰이 부족해서 각종 사건사고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국민 보호는 고사하고, 부족한 인력 때문에 무리하게 일을 하다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 일까지 빈발하고 있다. 안전 서비스도 부실하기 그지없다. 현장은 고사하고, 서류 점검조차 버겁다. 이조차도 대부분 외주화되어 있다 보니, 형식적인 점검에 그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대형 안전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재발 방지를 약속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일한 사고가 반복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근로감독관은 일년 내내 현장을 다녀도 자신이 관할하는 사업장을 다 둘러보지 못한다. 근로감독관만 늘어나도 부당노동행위, 불법 임금체불, 최저임금 위반 등 노동현장의 상당수 갑질이 해결될 수 있다. 보육, 요양 등 공공 사회서비스 인력이 늘어나면, 더 이상 아이 양육과 노인 부양 때문에 여성이 직장생활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온 국민을 공포에 떨게 했던, 신종플루, 메르스 등 각종 전염병의 발생을 막고, 설사 발생하더라도 지난번처럼 허둥지둥하지 않고 초동대응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공공보건인력이 대폭 늘어나야 한다. 사람도 충원하지 않고, 백날 대책만 세워봐야 말짱 헛일이다. 이런 공공서비스가 없거나 부실해서, 국민이 얼마나 불안해하고, 각자도생으로 해결하느라 등골이 휘어지는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 국민도 선진국 국민처럼 양질의 공공서비스를 누릴 자격이 있다. 공공서비스 일자리 확충은 나와 가족, 이웃의 삶을 안전하고 풍요롭게 지켜준다. 그리고 20여년을 시설에 갇혀 산 50대 환자도 세상으로 나와,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 공공서비스 일자리는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책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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