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정의 달콤함’보다 중요한 것

2019.12.31 19:47 입력 2019.12.31 19:49 수정

국회 정문 바로 옆에는 형제복지원 생존자 모임의 농성천막이 있다. 일찍이 같은 장소에 비슷한 것이 설치된 일은 없었다. “국가는 우리에게 법을 지키라고 할 자격이 없다.” 2년여 전 천막이 처음 설치됐을 때 철거하려는 공무원들에게 생존자 대표가 한 말이다. 이후 철거 계고장이 몇 차례 날아들었지만 시민들의 호소와 관할구청의 유보적 태도 속에 천막은 두 해를 넘길 수 있었다. 그사이 국회 담벼락 아래엔 다른 농성천막들도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정동칼럼]‘당의정의 달콤함’보다 중요한 것

지난 연말 생존자 한 명이 과거사법의 통과를 요구하며 고공 단식농성을 전개했다.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농성장을 찾았지만 이전에도 그곳에는 ‘무언가’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학비리를 내부제보하고 학계에서 퇴출당한 연구자, 인사과장에게 성폭행당하고 살해된 여성의 부모, 한부모가정 자녀라는 이유로 관심사병으로 분류된 뒤 강제 전역된 남성의 엄마, 학교폭력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이의 엄마, 군 입대 후 의문의 사고로 두 다리를 절단하게 된 청년의 형, 청년시절 간첩으로 조작돼 구속되고 고문당했던 의사…. 국가와 사회로부터 배제된 여러 사람들이 농성천막을 제집처럼 오갔다.

이처럼 억울한 삶이 다른 억울한 삶과 연대하는 사이, 또 다른 사람들은 연민이 아니라 미안함과 죄책감에서 천막을 찾았다. 생존자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겪은 불운을 제 탓으로 여기며 사죄하는 마음이었다. 무고한 시민들이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것은 경찰과 국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붙잡혀 갈 때 박수를 보내며 환호하고, 부랑아라고 외면했던 시민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오래전의 그 일을 제 탓으로 여긴 이들의 대부분은 생존자들처럼 제 몫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해고노동자, 주거말소자, 장애인처럼 몫을 빼앗겼거나 인의협 의사, 인권 변호사, 장애인신문 발행인과 기자, 빈민단체와 인권단체 활동가처럼 제 몫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이 천막을 찾았다.

생존자들 또한 그들이 받은 지지와 연대를 세상에 돌려주고자 했다. 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의 사진전을 찾아가 위로와 격려를 전하고, 아들 잃은 모친의 국방부 앞 시위에 함께했다.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를 찾아가 힘을 보탰고, 부당한 제도에 항의하는 1인 시위자에게 따뜻한 차 한잔을 대접했다. 가진 것 하나 없었지만 시민들의 후원금은 거절했고, 농성자금 마련을 위해서는 기꺼이 쌈짓돈을 털었다.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두 해 전에는 인권상과 함께 받은 상금도 기부했다. 동정과 연민을 거부한 대신, 공감과 이해로 함께 나아가고자 했다. 그것이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 사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배제된 사람들이 나누는 공감, 몫 없는 자들의 연대는 다른 곳에도 있다. 1970년 분신한 청계피복 노동자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은 살아생전 억압당하고 차별받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어머니였다. 또 1984년 분신한 민경교통 박종만의 처 조인식은 수십년간 다른 택시기사 가족들의 고통과 함께했다. 그리고 지금, 2018년 죽임당한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의 모친 김미숙이 자식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겠노라 다짐하고 있다. 연대란 게 본디 이렇듯 억울한 삶과 죽음이 다른 억울한 삶과 죽음에 보내는 공감인지도 모른다.

몫 없는 자들의 연대는 종종 이율배반적이다. 몫 가진 자들이 더 가지려고 싸우는 동안 몫을 찾기는커녕 이익이 없는 일에 몸과 노력을 던진다. 부당한 권력의 피해자가 국가와 사회의 인권유린을 감시하고, 안전하지 못해 일어난 죽음으로 고통 받는 이가 안전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간첩으로 조작됐던 이들이 재심 판결로 받은 손해배상금을 ‘재단법인 진실의힘’에 내놓았고, 아들을 잃은 모친이 ‘사단법인 김용균재단’을 만들었다. 어제보다 오늘 세상이 나아졌다면 몫이 없거나, 몫을 빼앗겼거나, 몫을 포기한 사람들 때문이다.

2019년을 하루 남겨두고 공수처법이 통과됐다. 4월 말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되고 8개월 동안 선거법과 함께 정국의 핵이었다. 단상 점거와 몸싸움이 이어졌고 여야가 사활을 걸고 창과 방패를 들었다. 하지만 공수처법이 몫 없는 자들의 몫을 되찾아줄 것 같지는 않다. 총선이 치러지는 올해 여러 정당과 많은 정치인들은 다시금 호소할 것이다. 잃어버린 몫을 찾아주겠다고,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겠다고, 안전한 사회를 건설하겠다고. 하지만 당의정의 달콤한 유혹에 취하기보다 국회 앞 사람들과 어깨 겯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들과 연대하는 것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드는, 좀 더 분명한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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