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푸틴의 발레리나

2024.03.17 18:13 입력 2024.03.17 20:18 수정

발레 공연  <모댄스>에서 샤넬 무대의상을 입은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 무용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발레 공연 <모댄스>에서 샤넬 무대의상을 입은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 무용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독일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1886~1954)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 전 세계 오케스트라가 눈독을 들인 최고 지휘자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나치 추종자라는 꼬리표도 달려 있다. 그는 예술이 정치를 초월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런 신념은 그가 나치 독일에서 끝까지 지휘봉을 잡도록 만들었다. 이를 비난하는 이탈리아의 지휘자 토스카니니에게는 “바그너와 베토벤이 연주되는 곳이면 인간은 어디서나 자유롭다”고 응수했다.

그가 연주한 베토벤과 바그너가 나치즘을 초월할 수 있었을까. 그의 행적을 한마디로 단죄하기는 힘들다. 샤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도 나치 부역 혐의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보부아르는 나치에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에 “우린 살아야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문화계 측근으로 꼽히는 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의 한국 공연을 두고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푸틴의 발레리나’가 참가하는 공연을 지금 꼭 서울에 올려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반대 여론이 커지자 결국 다음달 열릴 예정이던 자하로바의 ‘모댄스’ 공연이 무산됐다. 지난 15일 기획사는 ‘안전 문제’를 이유로 공연 취소를 알렸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에서도 러시아 출신 예술가에 대한 보이콧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예술과 정치를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반론도 나온다. 러시아는 공연 취소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자하로바가 스타 무용수로 위세를 떨치게 된 이유가 실력만은 아닐 것이다. 푸틴의 선전도구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했기 때문 아닐까. 그는 러시아의 크름반도 합병에 찬성했고, 국가문화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러면서 ‘예술은 예술일 뿐’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고 항변한다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떤 예술이건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 예술이 정치적 문제에 힘을 보태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걸작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의 열망을 배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자하로바 공연 취소 사태는 ‘예술 작품을 정치적인 문제와 별도로 취급하는 게 가능한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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