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다른 나라의 복지는 ① 아르헨 ‘복지망국론의 진실’

2011.05.23 21:46 입력 2011.05.23 22:06 수정

퍼주기 복지로 경제파탄? 주범은 ‘신자유주의’

“세계 6위의 경제대국까지 올라갔던 아르헨티나가 바로 복지 포퓰리즘 때문에 발목이 잡혀서 국가 부도 사태를 맞지 않았습니까.”(1월14일, 한나라당 장윤석 정책위 부의장), “아르헨티나를 비롯해 과거 무상복지를 남발하다 추락하는 국가에서 보듯이 무상복지는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에 가야 가능한 일.”(3월14일, 한나라당 김무성 전 원내대표)

한국 보수진영은 아르헨티나의 실패를 내세워 국민의 복지 요구는 이기심으로, 이에 호응하는 정치는 포퓰리즘으로 깎아내린다. 과연 근거가 있는 얘기일까. 아르헨티나 현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복지 포퓰리즘’이 아니라 무능한 군사독재와 신자유주의에 의해 망가졌다는 점이다. 2001년 이후 경제위기의 기원을 1940년대 중반의 페론주의에서 찾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아르헨티나 복지망국론’은 짜깁기된 허상이었다.

# 지난달 13일 오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국회의사당 앞에선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 20여명이 모여 있었다. 연금 생활자들이었다. 이들은 “메넴 정권이 경제를 잘못 꾸려서 연금 가치가 반토막이 났다”며 성토하고 있었다.

‘공장 회생운동’(Movimiento Nacional de Fabricas Recuperadas) 소속 노동자들이 지난달 13일 오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국회의사당 앞 도로에서 양철북을 두드리며 정부에 일자리 보장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 김지환 기자

‘공장 회생운동’(Movimiento Nacional de Fabricas Recuperadas) 소속 노동자들이 지난달 13일 오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국회의사당 앞 도로에서 양철북을 두드리며 정부에 일자리 보장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 김지환 기자

20m 옆 도로에서는 ‘공장 회생운동’(Movimiento Nacional de Fabricas Recuperadas) 플래카드를 내건 청·장년의 노동자 100여명이 양철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이들은 말했다. 공장이 망하더라도 노동자들이 인수해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라는 것이 이들의 요구였다.

“우리 삶이 어려워진 건 정치인들이 경제정책을 잘못한 탓입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카를로스 아이오알고가 말했다. “메넴 정권 때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면서 달러와 페소를 묶어서 결국 내수산업을 다 죽였어요. 중산층이 그때 무너졌죠.” 그에게 ‘아르헨티나가 망한 것은 복지 포퓰리즘 때문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생뚱맞은 얘기라는 표정을 지었다. “복지라뇨? 쥐꼬리만한 연금 말고 뭐 있어야죠. 복지는 무슨.”

아르헨티나에서 만난 다른 이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아이오알고와 비슷한 대답들이 돌아왔다. 그중 라틴아메리카 사회과학대학(FLACSO) 루시아노 안드레나치 교수는 기자의 질문에 껄껄 웃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문제는 복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외국 돈을 꿔다가 잘못된 경제정책을 꾸린 탓에 제대로 된 경제개발 모델을 못 만들어낸 게 문제죠.”

# 아르헨티나 경제가 추락한 것은 군사독재(1976~83)하에서다. 민주화를 짓누른 ‘더러운 전쟁’ 속에 3만명이 실종되던 시절, 아르헨티나 외채는 크게 늘었다.

‘포퓰리즘 정책의 원조’로 불리는 후안 페론(1946~55)의 두 번째 집권 말인 76년 아르헨티나의 외채규모는 82억달러였다. 하지만 군정기간에 368억달러로 5배 가까이 늘어났다. 카를로스 메넴 집권기(1989~99)에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이어지면서 상황이 되레 악화됐다. 외채규모가 99년 기준 1478억달러로 불어났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잘못된 아르헨티나의 경제정책을 원인으로 꼽는다. 경제를 마구잡이로 외국에 개방하는 바람에 경제가 망가졌다는 것이다.

농업중심 경제의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 대공황의 여파를 겪으면서 산업중심 경제로의 변신을 꾀했다. 이때 늘어난 노동자의 지지에 힘입어 페론 정권이 등장했다. 하지만 임기말, 경제개방으로 방향을 틀고 임금동결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페론은 55년 쿠데타로 실각했다. 혼란기를 거쳐 76년 등장한 군사정부의 경제실정에 외채가 크게 불어났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국가채무를 책임감 없이 늘리기만 한 꼴”(안드레나치 교수)이었다. 인플레이션이 연 5000%에 달하는 경제 혼란기가 이어졌다. 그래도 버틸 만은 했다.

이어 노동자의 지지를 얻어 카를로스 메넴이 집권하면서 아르헨티나 경제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는 규제 완화·민영화·노동유연화 등 국제통화기금(IMF)의 처방을 적극 받아들였다. 그 여파로 일자리 60만개가 사라졌고, 파업은 혹독하게 진압됐다. 게다가 91년 IMF의 권고에 따라 페소화를 달러화에 1 대 1로 연동시키는 고정환율제를 도입하면서 아르헨티나 경제는 세계경제의 흐름에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됐다. 97년 아시아가 외환위기로 흔들리자 그 쓰나미가 아르헨티나를 덮쳤다. 아르헨티나는 결국 2001년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고 실업률은 33.8%로 치솟았다.

국회 앞 시위현장에서 만난 산후스토 공장의 노동자 레나토 아벤다뇨는 “고정환율제가 되면서 여기서 생산하는 것보다 중국에서 수입하는 게 더 싸졌다”고 회고했다.

“메넴 정권 때 경제가 개방되면서 몇몇 대기업들이 경제를 독식했어요. 기업들이 국내 생산은 하지 않고 외국제품들을 싼값에 수입해다 팔아서 이익을 챙겼어요.”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이성형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교수는 “아르헨티나의 고질화된 재정적자 문제는 국부를 독식하는 대기업들, 그리고 메넴의 민영화·규제완화 이후 아르헨티나를 장악한 금융자본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복지국가를 말한다](2부) 다른 나라의 복지는 ① 아르헨 ‘복지망국론의 진실’

# 페론 집권기에 대폭 확대한 복지시스템이 국가경제에 부담이 됐던 것은 아닐까. 전문가들은 고개를 저었다. 아르헨티나의 복지황금기는 페론의 집권 초 5년에 그쳤기 때문이다. 이후 정치혼란기와 군사독재정권, 메넴 정권에 이르기까지 나라 살림살이가 어렵다면서 의료, 교육, 주거복지 등을 큰 폭으로 줄였다. 안드레나치 교수는 “군사독재정권 때 사회보험기금이 크게 줄었는데, 그건 복지지출이 아닌 정부의 기금 전용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차적으로 군정기간에 무너진 아르헨티나의 복지제도는 메넴 시대에는 신자유주의 파도 속에 흔적만 남게 됐다. 91~94년 아르헨티나의 사회지출 수준은 80년대에도 못미쳤다. 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고정환율제가 무너지던 2001년 당시 빈곤층은 55%에 달했다. 임금과 복지가 고장난 아르헨티나의 빈부격차는 심각해졌다. 2009년 유엔 자료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상위 20%의 소득은 하위 20%의 17.8배에 이른다. 소득분배의 불평등 정도를 0과 1 사이의 값으로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0.513(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 정도가 심함)으로 불평등이 매우 심하다는 게 각종 수치로 확인되는 셈이다.

일부 국내 보수언론은 아르헨티나에서 아직도 복지지출이 상당한 것으로 오도한다. ‘복지혜택을 늘려달라’며 피켓을 들고 도로를 점거한 ‘피케테로’의 시위를 “현금을 뿌리는 무분별한 복지지출” 현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 무너진 임금과 황폐해진 복지제도가 있다는 점은 전하지 않는다.

# 아르헨티나의 복지에 관해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진실이 있다. 중산층 이상의 선별복지 성격이 그것이다.

노동자의 지지를 받아 당선된 페론은 노동조합에 시혜적인 복지와 높은 임금 등을 내놓았다. 최저임금제가 도입됐고 남녀간 임금차별이 줄어들었으며 농촌 노동자들의 노동조건도 나아졌다. 하지만 이 같은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페론의 지지기반인 공무원과 노조에 소속된 노동자들에게만 혜택이 주어졌고 노동시장에서도 하층인 비공식 부문 노동자(33%)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어떤 일자리를 갖느냐에 따라 복지에서 차별을 받는 관행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노동자 아벤다뇨는 “어느 직장에 다니느냐에 따라 혜택 수준이 달라진다. 군사 쿠데타 전에는 임금의 82%를 연금으로 받았는데, 이젠 소속 직군별로 수령액이 다르다. 이는 의료보험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 같은 ‘들쭉날쭉 복지’는 아르헨티나를 비롯해 남미 전반에서 발견된다고 에블린 휴버 노스캐롤라이나대 교수는 <복지국가 핸드북>을 통해 지적한다. 사회부조가 상대적으로 발달한 반면, 이보다 지출비용이나 적용대상 규모가 큰 사회보장제도인 연금 등 사회보험이 중상층에게 유리하게 설계돼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남미에서는 복지를 통한 소득재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50년대 아르헨티나 사회정책들이 주로 반자치단체로 페론의 부인 에비타가 세운 ‘에비타 재단’을 통해 이뤄진 점 역시 복지를 통해 사회통합을 이루기보다는 정치적 지지기반을 늘리려는 시혜적 성격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 그렇다면 아르헨티나 복지망국론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이성형 교수는 한국 언론의 아르헨티나 관련 보도 태도의 문제를 지적한다.

“90년대 한국 언론은 메넴이 페론당 출신이지만 페론주의와 결별하고 IMF의 처방을 모범적으로 실행한 자유경제의 선봉자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2001년 아르헨티나가 신자유주의 정책의 여파로 디폴트 상태가 되자 ‘페론주의’와 ‘포퓰리즘’이 아르헨티나의 패인이라며 기억상실증적인 태도를 보인 바 있죠.”

이 교수는 “아르헨티나 사태에서 무언가 배우고 교훈을 얻으려는 강박관념은 이해되지만, 현실과 맞지도 않는 과도한 복지정책, 노조의 저항을 머리에 먼저 떠올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 최민영·송윤경·유정인·김지환·박은하 기자
■ 블로그 welfarekorea.khan.kr
■ 이메일 min@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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