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풀이된 ‘일터의 죽음’에 유족은 투사가 된다

2021.05.09 21:01 입력 2021.05.10 09:27 수정
고희진·평택 | 정대연 기자

20대 노동자 이선호씨의 빈소가 차려진 경기 평택시 안중읍 안중백병원 장례식장에서 9일 이씨 아버지 이재훈씨(왼쪽)가 문상 온 김제남 청와대 시민사회수석과 대화하고 있다.    정대연 기자

20대 노동자 이선호씨의 빈소가 차려진 경기 평택시 안중읍 안중백병원 장례식장에서 9일 이씨 아버지 이재훈씨(왼쪽)가 문상 온 김제남 청와대 시민사회수석과 대화하고 있다. 정대연 기자

이씨 아버지, 조문 온 청 수석에
“산재 사망 없앤다더니 뭐 했나”

김용균·문중원…잇단 죽음에도
늑장 조사, 열악한 환경 그대로
“사회가 안 들으니 직접 나서야”

“문재인 정부 출범할 때, 나는 세상이 디비질(뒤집힐) 줄 알았습니다. 산재 사망사고 없앤다고, 비정규직 없앤다고 (했는데) 도대체 뭐하셨습니까. 얼마나 더 죽어야 됩니까. 애들이 일하러 나갔지 죽으러 나갔습니까….”

9일 경기 평택시 안중읍 안중백병원 장례식장. 지난달 22일 평택항 신컨테이너 터미널에서 작업 중 사망한 이선호씨(23)의 아버지 이재훈씨(59)가 조문 온 김제남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앞에서 울부짖었다.

선호씨 부자는 사고가 난 컨테이너를 관리하는 동방의 하청업체 소속 일용직 노동자였다. 선호씨는 안전관리자 없는 현장에 처음 투입돼 안전모도 지급받지 못한 채 300㎏ 무게의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숨졌다. “아들 죽음을 개죽음을 만들 수 없”었던 아버지가 2주 만에 진상규명을 요구하자 회사도, 정부도, 정치권도 ‘20대 무명 노동자 사망’ 정도로 잊힐 뻔한 사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김용균, 장민순, 이한빛, 문중원씨 등 그간 발생한 노동자의 죽음 역시 그랬다. 노동현장의 사망사고, 회사와 정부의 책임 떠넘기기가 반복되는 사이 유족들은 ‘투사’로 떠밀렸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의 호소는 중대재해처벌법 마련의 기틀이 됐다. 김씨는 “유족이 나서지 않으면 사회가 들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 피해자 가족이 나설 수밖에 없다”고 했다. 온라인 강의업체 에스티유니타스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하다 과로를 호소하며 극단적 선택을 한 장민순씨, 미디어 업계에 만연한 과로 문제를 지적하며 목숨을 끊은 PD 이한빛씨, 마사회 부정을 폭로하고 숨진 기수 문중원씨의 죽음 모두 아버지, 언니, 부인 등 유족이 사건을 공론화해 열악한 노동환경에 경종을 울렸다. 장씨 언니 장향미씨는 “사건 조사가 잘 이뤄졌다면 유가족이 굳이 언론에 나와서 말하지 않아도 됐을 거다. 유족을 ‘거리의 투사’로 내모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재훈씨는 진상조사와 재발방지대책 마련 전까지 장례를 마무리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씨는 “지난 3월 원청에 새 사업부장이 오면서 비용을 절감한다며 근무체계를 다 바꿨다. 직원들이 ‘이러다 사고난다’고 했는데 결국 내 아들이 죽었다”며 “원청에서 보낸 사람들이 장례식장을 찾아 빨리 합의만 하려고 할 때마다 속이 갈기갈기 찢어졌다”고 말했다. ‘고 이선호군 산재사망사고 대책위원회’ 관계자는 “중대재해법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어제도 현대중공업·현대제철 등 사망사고가 계속됐다. 제도 전반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동방은 지난 4일 사고 원인 조사가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현장 작업중지 해제를 요청했지만 고용노동부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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