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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 투성이’ 성추행 피해 여군 사망 현장…무단침입 가해자 수색 안 한 군 경찰

2021.12.14 06:00 입력 2021.12.14 07:20 수정

‘주거침입·강제추행 혐의’ 이 준위 수사기록 살펴보니

공군 제8전투비행단 사망 사건 가해자 이모 준위가 피해자인 A하사의 집 창문(우측 화살표)을 넘어 들어온 뒤 집안에 있던 A4 용지(좌측 동그라미)를 만지기까지의 동선.

공군 제8전투비행단 사망 사건 가해자 이모 준위가 피해자인 A하사의 집 창문(우측 화살표)을 넘어 들어온 뒤 집안에 있던 A4 용지(좌측 동그라미)를 만지기까지의 동선.

공군 제8전투비행단에서 항공기 자재 관리 업무를 담당해온 A하사는 같은 부서 상관인 이모 준위로부터 마지막으로 강제추행을 당한 지 한 달 만인 5월11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 준위는 A하사가 출근하지 않자 사건 당일 부대를 출발해 영외에 거주하는 A하사의 집에 갔다.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이 준위는 오전 8시45분쯤 현장에 도착한 부대 주임원사와 함께 방범창을 뜯고 집에 들어갔다가 시신을 발견했다.

경향신문이 13일 주거침입·강제추행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이 준위의 수사기록 3600여쪽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A하사의 시신을 발견한 이 준위는 112나 119에 사망 소식을 알리지 않고 현장에서 유류품을 만졌다. 가해자인 이 준위가 피해자의 사망 현장에 수사기관보다 먼저 도착해 증거물에 손을 댄 것이다. 그런데도 군 경찰은 이 준위의 신체와 차량을 수색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석연치 않은 정황이 한 둘이 아니라고 A하사의 유가족은 의심한다. 유가족은 군 경찰 수사관들을 직권남용 혐의로 국방부 검찰단에 고소할 예정이다.

①가해자가 들춰본 A4 용지…피해자 집 가장 안쪽 위치

당초 이 준위는 군 경찰 조사에서 증거물에 손을 댄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디지털 포렌식 결과 이 준위는 5월16일 주임원사와의 통화에서 “참 큰일이다. 내가 잠깐 동안 거실에 들어갔을 때 몇 개를 만졌어. 종이 이런 것을”이라며 “거실 한 쪽에 노트 하나하고 A4 몇 개가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걸 만졌어”라고 했다.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나자 이 준위는 말을 바꿔 A4 용지를 만진 사실은 인정했다.

8전투비행단 소속 중대 감독관인 이모 준위(녹취록 속 ‘감’)와 부대 주임원사(‘박’)가 지난 5월16일 나눈 통화 녹취록

8전투비행단 소속 중대 감독관인 이모 준위(녹취록 속 ‘감’)와 부대 주임원사(‘박’)가 지난 5월16일 나눈 통화 녹취록

이 준위가 ‘우연히’ 만졌다는 A4 용지는 집안 가장 깊숙한 곳에 놓여 있었다. 군 수사기록에 따르면 A4 용지는 베란다 창문 옆에 있는 침대 머리맡에 있었다. 창문을 넘어서 들어간 이 준위가 해당 위치까지 가려면 A하사의 시신과 주방을 지나 거실 가장 안쪽까지 이동해야 했다. 또 A4 용지는 머리맡 가장 안쪽에 놓인 터라 이부자리를 밟아야만 만질 수 있게 돼 있었다.

이 준위는 군 검찰에서 “(A4 용지를) 딱 하나 만졌다가 그 자리에 놓은 것이라서 주거를 수색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면서 “처음에 수사기관에 말하지 못한 것은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A씨의 아버지는 “이 준위는 A4 용지를 우연히 만졌다고 했는데 이것은 거짓말”이라며 “유서를 찾기 위해 종이류를 의도적으로 뒤진 것 같다”고 주장했다.

②찢겨진 공책과 사라진 노트북…유서 행방은

A하사가 사망한 옷방의 빨래 건조대 위에는 공책이 한 권 있었다. 공책 사이에는 모서리가 부채꼴 모양으로 찢겨 나간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찢겨 나간 부분은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유가족은 사라진 부분에 유서가 적혀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A하사 사망 현장에서 발견된 노트 일부분.

A하사 사망 현장에서 발견된 노트 일부분.

집 안에서는 A하사가 평소 사용하던 노트북도 발견되지 않았다. 한때 A하사와 함께 생활했던 동기 부사관은 사라진 노트북에 대해 “책상 위 또는 침대 옆 서랍장 위에 올려놓고 썼다”고 했다. 군 경찰은 부대 안팎에 현수막을 붙이는 등 노트북을 확보하기 위해 수소문을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이 준위는 6월4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진행된 거짓말탐지기 조사에서 ‘현장에서 노트북이나 유서 등 기록물을 챙겨 나온 일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했지만 이는 거짓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③창문서도 보인 시신…가해자 “자는 줄 알고 깨우려 했다”

이 준위는 군 검찰 조사에서 주거지에 침입한 이유에 대해 “A하사가 자는 줄 알고 깨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창문을 넘어 방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사망 사실을 몰랐고, A씨를 깨워서 출근시키기 위해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 감식반 등이 찍은 사진에 따르면 아파트 복도에서도 창문을 통해 시신을 확인할 수 있는 구조다. 현장에서 이 준위와 함께 방범창을 뜯은 주임원사 역시 “창문을 통해 자세히 쳐다보니 시신이 보여 이 준위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A하사가 사망한 옷방 창문을 복도에서 찍은 사진(왼쪽). 오른쪽 창문을 열고 방 안쪽을 보면 A씨가 사망한 장소가 보인다(오른쪽).

A하사가 사망한 옷방 창문을 복도에서 찍은 사진(왼쪽). 오른쪽 창문을 열고 방 안쪽을 보면 A씨가 사망한 장소가 보인다(오른쪽).

그러나 이 준위는 “오른쪽 창문으로 보면 보일 수 있으나 왼쪽 창문만 열어봐서 피해자의 시신을 보지 못했다”며 “몸에 이상이 있다고는 생각했으나 (A하사가)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응급차를 부르는 게 상식이 아니냐’는 군 검사의 질문에는 “집에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고 답변했다.

④집에 없던 휴지로 가린 외시경…군 경찰 “피해자 유전자 검출” 거짓말

사망 당일 A하사의 집 현관문 외시경은 엠보싱 무늬가 거의 없는 얇은 흰색 휴지로 가려져 있었다. 이 휴지는 A하사 집에서 발견된 세 종류의 휴지와 다른 것이었다. 유가족은 누군가 밖에서 안으로 들여볼 수 없도록 의도적으로 외시경을 가렸다고 의심해 유전자 감식을 요구했다. 5월31일 군 경찰은 국방부조사본부 과학수사연구소로부터 외시경에 꽂힌 휴지에선 어느 유전자형도 검출되지 않았다는 감정서를 받았다. 그러나 군 경찰은 6월8일 유가족에게 “감정 결과 변사자 유전자 검출 외 특이사항이 없다”고 했다. A하사의 유전자만 검출됐다고 사실과 달리 말한 것이다.

⑤부실·늑장 수사에 사라진 가해자 블랙박스 영상

군 경찰은 이 준위가 사망 현장에 무단 침입한 사실을 확인하고도 소지품을 검사하지 않았다. 이후 5월19일 유가족이 신체 수색 여부에 대해 질의하자 6월8일 수사보고서에 “최초 발견자들의 소지품 검사를 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부실한 초동수사 탓에 이 준위의 차량 블랙박스 영상도 사라졌다. A하사는 사망 이틀 전인 5월9일 낮 12시18분쯤 이 준위의 차량에 탑승해 15분 간 대화를 나눴다. A하사는 이 준위와 만난 뒤 사망에 이를 때까지 다른 사람들과 만나지 않았다. A하사의 사망 원인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증거임에도 군 경찰은 사건 당일인 5월11일 이 준위의 차량 블랙박스를 확인하지 않았다. 군 경찰은 5월13일이 돼서야 블랙박스를 확인했는데, 최신 영상이 덮어쓰기 돼 9일과 11일 영상은 이미 유실된 상태였다.

군 경찰에서 6월8일 작성한 ‘유가족 요구사항 및 수사 진행사항’ 관련 수사보고서.

군 경찰에서 6월8일 작성한 ‘유가족 요구사항 및 수사 진행사항’ 관련 수사보고서.

유가족은 6월4일 현장 증거가 훼손된 점을 들어 군 경찰에 이 준위의 구속 수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군 법원은 6월19일 “구속 사유가 부족하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유가족은 “군 경찰은 사건을 해결할 기회를 두 번 놓쳤다”면서 “초동수사 현장에서 몸수색도 안 하고 차량 수색도 하지 않아 골든타임을 놓쳤고, 구속수사 요청까지 기각당해 진실을 밝힐 기회를 놓쳤다”고 말했다. A하사 사망 사건에 대한 1심 선고 공판은 오는 23일 경기도 평택시 오산 공군기지 군사법원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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