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의 시대, 그리고 나의 해촉증명서

2020.12.11 16:22 입력 2020.12.11 23:19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직업 안정성 위협 받는 사회…생존형 ‘부캐’는 일일이 증명해야 하나

성공한 ‘부캐’들은 가상의 프로필을 납득할 맥락도 포함한다. 유재석의 부캐 유산슬은 트로트 가수 데뷔 과정을 충분히 보여준 뒤 붙은 활동명이다. 유산슬은 뉴트로 댄스그룹 싹쓰리(왼쪽 사진) 멤버 유두래곤으로 이어졌다. ‘주라주라’의 김다비 캐릭터는 김신영이 그간 쌓은 서사 덕에 가능했다. 언론에선 부캐 개념의 오·남용 현상도 벌어진다. ‘N잡러 담론’에선 ‘생존형 부캐’들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있는지도 물어야 한다.

성공한 ‘부캐’들은 가상의 프로필을 납득할 맥락도 포함한다. 유재석의 부캐 유산슬은 트로트 가수 데뷔 과정을 충분히 보여준 뒤 붙은 활동명이다. 유산슬은 뉴트로 댄스그룹 싹쓰리(왼쪽 사진) 멤버 유두래곤으로 이어졌다. ‘주라주라’의 김다비 캐릭터는 김신영이 그간 쌓은 서사 덕에 가능했다. 언론에선 부캐 개념의 오·남용 현상도 벌어진다. ‘N잡러 담론’에선 ‘생존형 부캐’들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있는지도 물어야 한다.

2020년은 ‘부캐(부캐릭터)’의 시대였다. 지난해 MBC <놀면 뭐 하니?>에서 유산슬이라는 ‘부캐’로 트로트 가요계에 성공적으로 데뷔한 유재석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뉴트로 댄스그룹 싹쓰리의 멤버 유두래곤, 여성 4인조 환불원정대의 수상하지만 유능한 제작자 지미 유 등의 ‘부캐’로 역시 성공적인 한 해를 보냈다. 해당 프로젝트에 린다 G, 만옥 등의 ‘부캐’로 활동한 이효리와 엄정화도 그 덕분에 확장된 무대에서 활약했다. 언제나 재능 넘치는 코미디언인 김신영은 지난 5월 둘째 이모 김다비라는 가상 캐릭터를 만들어 ‘주라주라’는 곡을 발표하고 김다비의 정체성으로 다수의 예능 프로그램에 나왔다. 하지만 ‘부캐’가 2020년 대중문화를 지배하는 키워드가 된 건 이들 성공 사례 때문만은 아니다. ‘부캐’라는 개념이 유행하자 시류에 영합한 온갖 설익은 시도들이 등장했고, 대부분의 신조어에서 그러하듯 개념을 아무렇게나 확장해 사용한 언론의 합세로 ‘부캐’ 개념의 인플레이션이 벌어졌다. 역설적이지만, 어떤 독특한 개념의 대중적 영향력은 그것의 엄정하고 독창적인 의미가 휘발되고 무제한적인 범용성을 갖게 될 때 가장 강력해진다.

‘부캐’ 개념의 유행과 함께 개그맨 허경환과 이상훈이 만든 억G 조G처럼 아무런 맥락도 없는 콘셉트 활동이 등장했다. 2313년에 살던 슈퍼스타가 현시대에 왔다는 억G 조G의 설정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다만 그 설정을 땅에 발붙이게 해줄 만한 부가 요소가 부재할 뿐이다. 연예계에서 실제로 성공한 ‘부캐’들은 단순한 콘셉트 놀이와는 거리가 멀다. 이들 캐릭터는 가상의 프로필을 사용하지만 그것이 납득될 수 있는 맥락도 캐릭터 안에 포함한다. 유산슬은 트로트 가수 데뷔를 위한 과정을 충분히 보여준 뒤 붙은 활동명이고, 김다비의 ‘주라주라’는 기본적으로 김신영이 가장 잘 연기하던 경상도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빌려 소속사 사장 송은이에게 싫은 소리 하는 콘셉트다. 즉 김신영이라는 인물이 누적한 서사가 김다비 캐릭터를 이해할 맥락을 구성하는 것이다. 마냥 코믹 콘셉트로만 보이는 마미손 역시 100% 본인으로 추정되는 인기 래퍼가 Mnet <쇼 미 더 머니 777>에 출연해 떨어지는 굴욕을 겪고 그것을 캐릭터의 분노 및 ‘소년 점프’의 가사로 구성했기에 하나의 일관된 서사를 가질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바로 그 마미손, 김다비 등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Mnet <부캐선발대회>의 참가 캐릭터 다수는 억G 조G가 그러하듯 자의적인 설정을 내세운다.

연예인들이 현실과 온전히 분리된 설정 놀음으로 ‘부캐’ 개념을 활용했다면, 언론은 반대로 해당 개념을 현실에 등장하는 이런저런 현상을 해석하는 데 무분별하게 사용한다. 당장 ‘부캐’로 검색했을 때 나오는 최근 기사들을 보면 ‘스타강사 설민석, 부캐 벗고 본캐로 유튜브 입성’이라는 타이틀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 전문 강사라는 직업 활동을 ‘부캐’로 놓고 ‘본캐’인 자연인으로서의 설민석을 보여주는 채널을 만들겠다는 내용이다. 본인이 강의와 방송에서 보여주는 모든 것이, 가령 MBC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 육영수가 피살된 날 노을이 그렇게 붉을 수 없었다고 회고하던 모습 같은 것들이 콘셉트에 의한 연기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면, 강사로서의 설민석을 ‘부캐’로 이야기하는 것이 쉽게 이해되진 않는다. 사회적 자아라는 기존 개념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거니와 과연 사회적 자아를 ‘부캐’로 볼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본캐’로서의 사적 자아라는 것조차 결국 친구와 가족 등을 대할 때 쓰는 또 다른 페르소나에 가깝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SBS <런닝맨>에 대한 최근 기사에선 ‘송지효, 방 탈출 미션에 부캐 멍지효 소환’이란 타이틀이 붙었다. <런닝맨>을 초기부터 본 시청자라면 알겠지만 멍지효는 송지효의 ‘부캐’라기보다는 그의 어떤 성격적 요소를 수식하는 별명이었다. 유행하는 개념을 제한 없이 남용하니 직업도 ‘부캐’가 되고 별명도 ‘부캐’가 된다. 한쪽에선 현실적 맥락과 동떨어진 차원에서 ‘부캐’가 쓰이고 다른 한쪽에선 현실의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개념으로 ‘부캐’가 쓰인다. 둘은 딱히 정합적이지 않다. 개념의 오남용이 맞다. 하지만 개념의 유행에서 중요한 건 개념이 아니라 유행이다.

‘부캐’ 개념의 유행은 각각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한쪽에선 자신과 전혀 다른 자아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선 우리가 이미 일상에서 다른 자아를 연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얼핏 모순적인 두 언술은 다음과 같이 통합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 일상에서도 일상과 괴리된 특별한 자아를 연출할 수 있다. 이것을 과연 ‘부캐’의 유행에 깔린 대중적 욕망이라 할 수 있을까.

앞서 인용한 언론의 개념 남발과는 거리가 먼, ‘부캐’ 개념을 소위 ‘N잡러’라는 새로운 직업 형태 및 자아상으로 확장한 진지한 담론에서 비슷한 욕망을 확인할 수 있다. 콘텐츠 구독서비스 퍼블리의 박소령 대표는 조선일보 칼럼에서 퍼블리에서 만든 ‘당신의 회사용 부캐는 무엇인가요?’라는 성격 유형 테스트에 10만명이 참여한 사례를 이야기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직장에서의 사회적 자아를 굳이 ‘부캐’라 수식할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참여 후기 중 한 사회관계망서비스 유저의 반응을 예로 들며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는 여러 자아를 숨 쉬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리타 카터가 <다중인격의 심리학>에서 밝히듯 여러 자아를 지니는 건 현대인의 꽤 보편적인 특징이지만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밀레니얼의 특성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특성은 무엇으로 비롯된 것인가. 마치 우연처럼 해당 칼럼과 비슷한 시기에 프레시안은 카피라이터, 만화가, 에세이스트, 시인 등 다양한 직업으로 활동한 홍인혜 작가의 강연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캐의 시대다. 부캐를 앞세운 예능 프로그램이 승승장구하는가 하면 요즘 유행하는 자기계발서에 등장하는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N잡러다.” 사실 홍인혜 작가의 활동은 재주 많고 용기 있는 이의 특별 케이스에 가깝다. 하지만 이제 그런 N잡러에 대한 젊은 세대의 동경은 보편화됐고, 그들이 소화해야 할 다양한 직업적 자아는 ‘부캐’라는 신조어로 좀 더 유희적이고 개성적으로 개념화된다.

이것이 박소령이 말하듯 “차별화의 욕구가 높은 이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만 할까. 최병일 경제경영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매일경제 칼럼에서 ‘부캐’의 인기에 대한 “사회적 필요”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유치원생들이 노동시장에 진출할 때가 되면 기존 세대보다는 훨씬 더 많이 직장을 옮겨야 하고,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사례가 일반화될 것”이며 “1인 다직종에 대한 필요를 빨리 인지하고 이에 적응하는 사람들이 생존에 더 유리한 환경이 된 것은 분명”하다고. 해당 칼럼에서 플랫폼노동과 긱 이코노미를 긍정적인 기회로 묘사한 것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지만, N잡러와 그에 따른 다양한 자아의 연출이 고용 안정성이 무너진 시대의 필연적 생존 방식이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것은 거스르기 어려운 흐름이란 것도 맞고, 그에 대한 다양한 ‘부캐’를 만들어 건강한 자아를 유지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안정성이 무너진 시대에 사회가 그에 대한 연대적 책임감을 드러내는 대신 ‘부캐’라는 그럴싸한 허울로 현상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걸 건강하다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사회는 생존형 ‘부캐’들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는 있는가.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당장 프리랜서인 나는 이달 11장의 해촉증명서를 요청해 발급받았다. 요즘 말로 치면 나의 ‘부캐’는 11개나 되는데, 그게 ‘부캐’라는 걸 내가 일일이 증명해야 한다. 내 여러 ‘부캐’ 중 가장 세상에 비판적인 경향신문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자아가 문화비평 형식을 빌려 이 부조리를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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