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이중섭 화랑가·적산가옥 등 곳곳에 한국 근현대 ‘빛바랜 흔적들’

2017.11.06 22:14 입력 2017.11.07 19:34 수정

‘경계지’를 아시나요

지난 10월19일 게이트22 활동가들이 용산미군기지 경계지를 걸으며 주변 지역을 둘러보고 있다. 게이트22는 용산미군기지 반환 이후 비어 있게 될 기지 부지에 대해 연구, 탐색하는 예술가단체이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지난 10월19일 게이트22 활동가들이 용산미군기지 경계지를 걸으며 주변 지역을 둘러보고 있다. 게이트22는 용산미군기지 반환 이후 비어 있게 될 기지 부지에 대해 연구, 탐색하는 예술가단체이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지난달 19일 쇠락해가는 서울 삼각지 삼각맨션에서 바라본 한국전력 창고는 수십년 동안 방치돼 주변엔 잡초만 무성하다. 모르는 이가 보기에는 폐허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공간이었지만 한전 창고는 사실 용산미군기지의 경계지로서 근대사의 숨은 사연을 담은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만든 목조창고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함께 현장을 둘러본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은 “한전 창고는 사실 대한제국 시기 고종의 근대화 노력이 좌절된 흔적"이라고 했다. 김 실장은 “고종은 전기·전차 도입을 위해 한성전기회사를 세웠는데 나라의 힘이 약해지면서 미국을 거쳐 일제의 손에 넘어갔다"며 "일제가 만든 경성전기주식회사가 이 부지를 이용했고, 현재 한전창고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이날 게이트22의 활동가들, 서울시 공무원, 용산문화원 소속의 향토사학자 등과 함께 둘러본 용산미군기지 경계지에는 근현대사의 장면들을 담은 공간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경계지란 미군기지를 둘러싼 담장들에 인접한 지역으로 공간적으로는 미군기지와 주변의 민간인 거주지역, 상업지역 사이의 완충지대라 할 수 있다. 사회·문화적으로는 미군기지의 영향으로 보존되거나 파생된 건물, 상점 등으로 이뤄진 지역을 말한다.

근대사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지만 현재는 방치돼 있는 서울 용산구 삼각지의 한국전력 창고 부지.  김기범 기자

근대사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지만 현재는 방치돼 있는 서울 용산구 삼각지의 한국전력 창고 부지. 김기범 기자

경계지는 근현대사에 대한 기록 및 보존 차원에서 연구·조사 필요성이 높지만 아직까지 국내에선 관심이 낮다보니 빠른 속도로 멸실되어가고 있다. 특히 미군기지 영향으로 형성됐던 삼각지 화랑가와 적산가옥들은 거의 본모습을 잃은 상태였다. 삼각지 화랑가는 미군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극장 간판을 그리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화공들이 모여 화방을 열었던 곳이다. 이중섭이나 박수근 같은 유명한 미술가들이 거쳐간 공간들이지만 현재는 일부 화방만이 남아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삼각지 화방들 주변 민가들 중에서는 서울 시내에서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형태의 적산가옥들도 눈에 띄었다. 적산가옥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세우고 거주하다가 패망 후 그대로 두고 간 건물이다. 주로 용산구, 종로구, 중구 등에 많이 분포해 있다. 이들 적산가옥 등은 인근 지역의 개발, 개발에 대한 기대감 등으로 빠르게 멸실되어가고 있다. 이날도 삼각지 부근에서는 오래된 적산가옥을 허물고 새로 건물을 올리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한전 창고 부지와 멀지 않은 용산우체국 부근의 옛 하자마구미 사옥은 원형이 잘 보존된 일제강점기 건물로 꼽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일본 유수의 건설회사였던 하자마구미가 세운 이 건물은 주변의 오래된 건물들이 대부분 붉은 벽돌로 지어진 것과는 달리 타일로 외장이 돼 있었다. 게이트22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당시 타일은 고급재료로서 해방 이전까지 타일로 마감을 한 건물은 매우 드물었다.

경계지에 포함될 수 있는 미군기지 주변 상업시설로는 기지 영향으로 만들어진 남영역 스테이크 거리, 이태원 양복점, 신용산역 주변 보세타운 등이 있다. 모두 미군들을 대상으로 하거나 미군기지로부터 흘러나온 문화의 영향으로 생겨난 곳들이다. 신용산역 인근의 게이트14 부근 역시 미군기지의 영향으로 보세타운이 형성됐던 곳이다. 현재는 게이트14를 바라보고 왼편의 상가건물에만 보세상점들이 남아 있고, 가건물에서 영업을 하던 보세상점들은 한 곳을 제외하곤 모두 떠난 상태다. 그냥 무심히 지나쳤던 일본식 가옥이나 삼각지 화랑거리, 이태원 양복점 등도 미군 주둔의 영향으로 보존되거나 생겨난 문화적 풍경이었던 셈이다.

이날 함께 경계지를 둘러본 게이트22는 주로 예술가, 문화운동가 등이 자발적으로 만든 단체로 용산미군기지에서 미군이 떠난 후 비워질 땅의 모습을 고민하는 예술가집단이다. 용산미군기지의 공식 게이트가 21개인 것에서 착안해 모두에게 열린 상상의 게이트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2013년부터 용산미군기지 주변 걷기, 경계지 조사 등 활동을 해왔다. 게이트22 홍서희씨는 “용산미군기지 경계지는 일제강점기부터 치면 100년 이상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자 전쟁에 발목이 잡혀 있었던 공간들”이라며 “이런 공간들에 대해 성찰하기 위해 경계지에 대한 탐색을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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