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보낸 자식 같은 김치

2014.11.20 20:54 입력 2014.11.20 21:11 수정

최근 호주 정부에서는 특별한 행사를 하나 열었다. ‘Invite the World to Dinner.’ 즉 전 세계 유명한 요리사, 요리 관련 저널리스트를 불러 한 편의 초대형 저녁 행사를 연 것이다. 호주 음식의 위대한 발전을 알리고, 관광 호주의 위상을 확인시켜주는 행사였다. 말하자면, 호주가 뛰어난 자연 풍광뿐 아니라 음식도 끝내준다는 자랑을 하러 연 모임이었다.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떠나보낸 자식 같은 김치

준비도 철저했다. 호주의 멋진 식재료와 포도주를 망라했고, 진행도 물 흐르듯 아름다웠다. 나는 말석 하나를 얻어 행사를 지켜보았는데,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치의 위상이었다. 남부의 아름다운 태즈메이니아 지역에서 열린 이 행사에서는 호주의 최고 요리사 셋이 각기 다른 요리를 선보였다. 그중 마지막 방점을 찍는 메인 요리에 김치가 나온 것이다.

어떻게 보면 평범해 보일 수 있는 소 등심구이에 김치가 척 하고 따라 나와서 요리의 격과 창의성을 높여주고 있었다. 일종의 백김치였는데, 짧게 발효시키고 식초로 양념을 했다. 가볍게 익힌 대신, 신맛을 도와주기 위해 식초를 뿌린 것이다. 우리 식으로 보면 덜 익은 김치일 텐데 새콤한 초산발효에 익숙하지 않은 다수의 서양인들에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을 듯하다.

김치는 모름지기 어때야 한다, 는 종주국의 시선으로 보면 기대에 못 미치겠지만 내 소견으로는 이런 김치야말로 다수가 바라마지 않는 ‘김치의 세계화’에서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였다. 짜장면과 짬뽕이 현지화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한국화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떠나보낸 자식 같은 김치

그런데 호주에서의 짧은 취재 동안 김치와 관련한 몇 가지 행복한 체험이 있었다. 체류 기간 동안 멜버른, 호바트 등의 도시에서 세 번의 식사를 했는데 마치 짠 것처럼 김치가 식탁에 나왔던 것이다. 물론 한식당이 아니라 호주식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곳에서는 새콤하게 만든 김치를 전채요리로-그것도 무려 호주식 샴페인에 어울리는 요리로-내놓았다. 노랑머리에 커다란 덩치의 백인 요리사가 말이다. 다른 곳에서는 아예 ‘김치와 한국식 치킨’이라는 이름의 메뉴가 인기 요리로 팔리고 있었다. 마지막의 식당에서는 마치 우리 김치볶음 같은 것을 내놓았다.

이미 김치는 우리 품을 떠난 것 같다. 아무리 애지중지하는 딸자식도 시집보내려면 품에서 내놓아야 한다. 김치를 세계에 보내주어야 한다는 어떤 뚜렷한 깨달음의 경험이었다. 김치는 꼭 한국식이어야 한다(그 한국식의 명확한 기준도 사실 모호하다)는 기준도 포기해야 한다. 지금 뉴욕에서 인기를 끄는 김치는 ‘모모후쿠’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는 퓨전식당에서 파는 것이다. 깍두기와 김치가 서양식 요리법에 융화되어 전혀 다른 얼굴로 접시에 담겨 팔린다. 김치를 세계인들이 어떻게 해석하는지, 앞으로 몇 년 후면 더욱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굳이 이러니저러니 홍보하지 않아도 맛있는 건 알아주게 되어 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