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자리 있습니까?

2016.02.02 20:57 입력 2016.02.02 21:03 수정
오은 | 시인

지하철을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여기 자리 있습니까?” 녹초가 된 한 청년이 힘없는 목소리로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아주머니는 자신이 앉은 옆자리에 커다란 상자 하나를 두고 있었다. “네, 그럼요.” 아주머니가 상자를 자신의 품으로 가져다 안았다.

[청춘직설] 여기 자리 있습니까?

청년이 벌떡 일어나 상자를 받아 좌석 위쪽에 마련된 선반에 올렸다. “가시는 데까진 편하게 가셔야죠.” “고마워요, 역시 젊으니까 힘이 좋네. 그 무거운 상자를 단번에 올리고.” 아주머니가 웃었고 청년도 희미하게 따라 웃었다. 한두 정거장쯤 지나자 청년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입고 있는 바지 여기저기에 라면 국물이 튀어 있었다. 편의점에서 밤샘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때마침 우연히 지하철 내에 붙어 있는 서울시 사업 홍보 포스터를 보았다. ‘2020 서울형 청년 보장제’의 일부로 설자리, 일자리, 살자리, 놀자리 등 네 가지 자리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다음 날 보건복지부는 청년취업패키지 등 정부가 현재 시행하고 있는 정책과 중복된다며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재미있는 것은 구직에 뛰어든 청년들 중에서 정부 시행 일자리 정책에 대해 알고 있는 비율이 40%가 안 된다는 사실이다. 정책에 대해 알고 있는 청년들조차 만족도 질문에는 30%를 밑도는 비율로 만족한다고 답했다. 다수는 모르고 소수만 만족하는 정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중앙정부의 시책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고 해서 지방정부나 민간에서 추진하는 프로그램들에 제동을 걸어서는 안 될 것이다. 청년들에게는 지금 숨 쉴 자리, 다름 아닌 숨구멍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5년 청년실업률은 9.2%로 관련 통계가 작성된 1999년 이후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고 한다. 취업준비생과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의 수까지 합산하면 실제 실업률은 이보다 훨씬 더 높을 것이다. 구직에 실패한 대학생들은 차마 졸업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취업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대학생 신분을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한다. 헬조선이나 N포세대와 같은 비관적인 말들이 사방에서 들려온다. 태어날 때 이미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데서 금수저나 흙수저처럼 자조적인 용어도 생겨났다. 자리가 나질 않으니 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고 하지만,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청년들을 반기는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자리가 없으니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수도 없다.

대한민국에 퍼져 있는 불안감은 지금 최대치다. 1월25일,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 등 이른바 ‘양대지침’이 노동 현장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저성과자를 쉽게 해고하는 것이 어떻게 노동 유연화와 청년 일자리 확대와 연결될 수 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양대지침이 노동 현장에 뿌리를 내리면 자리를 찾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리에 있는 사람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비정규직의 확산과 노동자의 임금 삭감을 부추기는 구실이 될 뿐이다. 지금도 수많은 청년들은 동분서주하며 굳게 닫힌 기업의 문을 두드리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절박하게 묻고 있다. “여기 자리 있습니까?” 앞으로는 어렵사리 일자리를 구한 사람들 또한 매일 퇴근길에 스스로에게 묻게 될 것이다. ‘내 자리, 아직 안전합니까?’

박근혜 정부는 지난 대선 당시 자신들이 내놓은 노동 분야 공약인 ‘늘·지·오’의 취지를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다. 늘·지·오는 좋은 일자리를 많이 “늘”리고, 지금 있는 일자리를 “지”키고, 나쁜 일자리를 좋은 일자리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작금의 양대지침은 그나마 있던 좋은 일자리도 나쁜 일자리로 바꾸고 지금 있는 일자리를 위태롭게 만들며 나쁜 일자리를 더 나쁜 비정규직 일자리로 끌어내리게 될 것이다. 구직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재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불안감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하나하나의 자리는 모두 소중하다. 집을 가리켜 “지내기에 매우 포근하고 아늑한 곳”이라는 뜻인 ‘보금자리’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밥을 먹거나 잠을 잘 때, 공부를 하고 사랑을 나눌 때도 모두 ‘자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청년들에게 이 모든 자리는 지금 ‘송곳자리’다. 송곳 끝이 뾰족뾰족 돋친 듯, 매우 불편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온종일 이런 자리들을 옮겨 다니는 청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자리는 바로 ‘꿈꿀 자리’일 것이다. 끼니를 때우듯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생각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여유일 것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봐야 한다. 큰 그림만 그리고 뜬구름을 잡기에는 이미 일상의 면면이 너무나도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다. 말로만 “청년이 미래다”라고 외칠 것이 아니라 미래를 열게끔 작은 것부터 도와줘야 한다. 중앙정부의 원칙만 고수할 것이 아니라 지방정부 및 민간과 협력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未來)는 말 그대로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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