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을 견디는 일

2018.05.29 20:54 입력 2018.05.29 20:58 수정

[정희진의 낯선 사이]넋을 견디는 일

몇 년 전까지 4월은 4·3과 세월호를 기억하는 달이 아니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4·3을 삭제하려 했고, 세월호 참사를 일으켰다. 예전에 5월은 ‘광주’로만 기억되었으나 2016년 이후에는 강남역 사건이 더해졌다. 민주화가 진전될수록 애도할 일도 많아지는 법이다. 내달, 6월에는 두 명의 중학생이 생각날 것이다. 2002년 6월,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중학생 사건(장갑차가 도로 폭보다 넓었다).

[정희진의 낯선 사이]넋을 견디는 일

최근 출간된 소설가 정찬의 작품집 <새의 시선>에는 2014년 늦은 봄부터 2017년 여름 사이에 쓰여진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작가는 그간의 소설 쓰기가 “넋을 견디는 행위”였다고 말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틴다, 견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사는 것도 힘겨운 지경인데, 죽은 자의 넋을 견디다니. 나는 이 글귀를 붙잡고 한동안 ‘넋을 놓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재해, 참혹한 ‘과거사’, 양극화된 노동조건, 혐오 범죄로 희생된 타인과 함께하는 삶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일상적 인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몸 밖에서 일어난 사건을, 어쩌면 당장은 무관한 일을 어떻게 내 일처럼 계속 의식하고 살 수 있겠는가. 매순간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넋을 견디는 일은 예술가만의 십자가이자 특권일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질주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죽음과 모욕이 생생히 구현되는 현장을 살고 있다. 차라리, ‘구조’는 멀다. 공포는 ‘자본의 직격탄’이다. 서울 지하철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 혼자 일하다 사망한 열아홉 살 청년부터, 용산참사, 세 모녀의 자살, 항공운송업 재벌의 맞춤형 밀수 사건까지.

애도는 소비의 적이다. 자본주의는 사유, 슬픔, 우울을 싫어한다. 낙관과 조증(躁症)이 자본주의적, 근대적 인지(認知) 상태다. 발전 지상주의 사회인 한국은 더욱 그렇다. 세월호 사건 때 택시를 탔는데 기사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4월이 행락철 대목이었는데 황사, 메르스, 세월호로 다 망했어요. 택시도, 관광버스 회사도 피해자예요. 죽은 사람은 안되었지만 산 사람은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의 생계 불안에 공감하면서, 생각했다. 고통 받는 이웃이 있고 나 역시 예외가 아닌 시대에, 죽은 자의 곁에 있지만 아직은 죽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구의역, 강남역 사건 이후 “너는 나다”는 글귀가 익숙하다. 며칠 전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관련한 포스터에서도 “너는 나다”를 발견하고 조금 놀랐다. 예전에는 “그들도 노동자에 포함시키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구호가 선의라는 것을 알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호소력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며, 정확히는 비윤리적이다. 그 누구도 타인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과 나는 다른 개인들이다. 우리는 동일한 위험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지 동일한 사람이 아니다.

“너는 곧 나”라는 주장은 구체적인 피해자의 위치(죽음)를, 아직은 살아 있는 내가 취(取)하는 행위다. 고통에 대한 동일시가 연대의 필수 조건은 아니다. 특히 말할 수 없는 처지의 피해자를 대변하려는 사회운동가나 지식인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윤리적 이슈다.

“잊지 말자” “나는 너다”, 두 가지 모두 불가능하다. 피해자와 유가족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같지 않다. 기억하고 견뎌야 하는 일도 전혀 다르다. 유가족은 “잊지 말자”는 다짐이 필요 없다. 오히려 그들은 잊기 위해 몸부림친다.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다짐을 거듭해야만 잊지 않을 수 있다. 사실 나는 그조차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망자의 넋을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행위가 가능한가? “잊지 말자”는 일상이 고통인 이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그들을 소외시키는 언어다. 슬픔이 일상이라면, 기억 투쟁은 필요하지 않다.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얼마나 다짐했던가. 그러나 거짓말처럼 비슷한 일이 무섭도록, 빨리,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구조적 해결도, 잊지 말자는 다짐도 다 공염불이다. 한국 사회, 믿을 수 없다.

우리는 진상 규명, 피해 보상, 명예 회복을 요구하지만 이는 당연한 것이다. 이는 문제 해결의 일부분일 뿐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가해자’인 국가 권력이, 다시 문제 해결자로 등극하는 것은 권력의 최종 심급으로서 국가의 위상을 강화하는 행위다.

소설가는 말한다. “만장이 펄럭이는 세계 속에서 넋을 피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죽은 너와 살아남은 내가 같다고 말하기 전에, 일상에서 ‘나’는 ‘너’를 견디고 있는가. 살아 있는 이웃도 견디기 힘든데, 보이지 않는 죽은 자의 넋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그들은 보이지 않고 갈수록 잊혀질 텐데….

“너는 나다”라는 착각 속에서는 넋을 견디는 긴장과 혼돈이 필요하지 않다. 넋을 마주하려면 일상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타인의 혼이 내 몸 안팎을 들락거린다. 산 자와 죽은 자는 동거한다. ‘나는’ ‘그들을’ 지켜보는 것이 힘겹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위로가 될지 모른다. 안전한 사회는 슬픔의 노래가 지속되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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