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의 훈계

2019.02.15 20:22 입력 2019.02.15 20:30 수정

사기죄로 재판을 받던 건축업자에게 판사가 판결을 선고했다. 집행유예가 붙어 풀려나는 것은 좋았는데, 판사가 준엄하게 피고인을 꾸짖었다. 돈도 없는 사람이 무슨 사업을 하겠다는 거냐, 앞으로는 절대로 건축 일을 하지 말아라, 이런 요지였다. 판사의 동정을 사려고 재판받는 날마다 법정에 목발을 짚고 나와 죽는 시늉을 하던 그 건축업자가 판결을 선고받고 법정 밖을 나오자마자 목발을 집어던지며 하는 말인즉, “나 참, 내가 돈이 있으면 뭣하러 건축 일을 해? 그냥 놀고 먹지”였다.

형사소송규칙 제147조는 ‘판결 선고 시의 훈계’라는 제하에 “재판장은 판결을 선고함에 있어 피고인에게 적절한 훈계를 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 무해한 규정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세상읽기]법정의 훈계

우선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첫 문장은 아버지가 아들을 타이르는 말로 시작된다. “네가 누구든지 남을 비난하고 싶을 때는 언제나, 이 세상 사람들이 너만큼 혜택을 받고 자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종의 상상력을 주문하는 것인데, 새겨 볼 만하지 않은가. 내가 법대 아래에서 재판을 받다 판사에게서 훈계를 들으면 기분이 어떨까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달리 보는 방법도 있다. 사법관이 내리는 판결은 권력작용이고 판결은 소송 당사자인 국민을 구속한다. 그러나 사법의 역사는 불행히도 오판으로 얼룩져 있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예를 들어 드레퓌스 사건의 재판은 악명 높은 오판이다. 그런 유의 오판까지는 몰라도, 혹시 내가 보지 못하는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를 가능성, 내 세계관이 꼭 옳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훈계할 마음이 날까.

나는 판사 자신도 부도덕할 수 있으니 피고인에게 훈계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판결에는 오판의 위험이 있으므로 판결 선고 시에는 훈계를 하지 않는 게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훈계의 배경인 도덕적 권위가 생래적으로 또는 후발적으로 상처를 입을 위험성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권력이 국민을 구속하는 것과는 별개의 차원에서, 국민에게 도덕적 정당성에서의 우월을 주장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권력이 부도덕한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권력이 도덕적 우월성을 확신하는 순간, 그것이 가져올 자제력의 결여 내지 부족, 선을 넘은 과격성 등 끔찍한 폐해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상대가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다르지 않다.

헤겔 식으로 말하자면 국가는 최고의 윤리체여야 한다. 그러나 국가권력은 합법적인 폭력이기는 하나, 폭력임에는 변함이 없다. 국가권력의 정당성이 가지는 근거를 도덕성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라인홀드 니버는 그의 명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국가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라고 했다. 그러나 정의는 개인에게 요구되는 도덕과 같지 않다. 다시 말해 정의란 국가공동체 내의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것은 아니다. 이것을 망각하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전체주의의 음습한 얼굴이 나타난다.

일전에 어느 재판장이 뇌물과 정치자금 수수로 기소된 국회의원에게 판결을 선고하면서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차라리 굶어 죽는 것이 더 명예롭다”라고 한 초대 대법원장 가인의 말을 인용해 그를 준엄하게 질타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가인의 말씀은 공직자가 새겨 들어야 할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공직자 누구나 그대로 행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몸 받아 살게 된 목숨, 아무렴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낫겠는가. 물론 뇌물을 받지 못해 죽기야 하겠는가마는, 뇌물받은 사람을 법으로 처벌하면 되지 그 자리에서 도덕적 훈계를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예가 마땅치 않은가? 그럼 정치범은 어떨까. 5공 시절 어느 공안검사가 반정부 시위를 한 학생을 기소한 일을 두고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순화’시키려고 해도 그 애는 틀려 먹었더라고. 이런 애들은 기소해서 하다못해 집행유예 딱지라도 붙여야 해. 그렇지 않아?” 그 사건의 담당 판사도 피고인에게 쓸데없는 짓 그만두고 공부나 하라고 훈계를 했다면, 글쎄, 그게 옳았을까.

목하 재판하던 사람들 중 최고의 직위에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법대 아래에서 재판을 받게 된 초유의 사태가 진행 중이다. 세상사란 항상 돌고 도는 법이다. 아무도 자기 자신의 도덕성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국가권력이 자기의 도덕성이나 세계관을 재판이라는 작용을 이용해 펼치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사법권의 행사가 여기에 발맞추어 가는 것도 물론 정당하지 않다. 회의할 줄 아는 사법철학의 정립은 판사의 영원한 과제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