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이 흉지?

2022.09.08 03:00 입력 2022.09.08 03:05 수정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던 윤석열 정부가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을 슬그머니 공론화하고, 전광석화처럼 결정했을 때 미심쩍었다. 광화문은 떡밥이었을 뿐, 애초부터 용산을 염두에 뒀던 것은 아닐까. 문재인 정부가 경호와 교통 등 현실적 어려움에 부딪혀 광화문 이전을 포기했다는 것을 윤 대통령이 모를 리 없을 터였다. 게다가 윤 대통령은 국방부 이전에 따른 안보공백 우려, 예산 편성 등 현실적 난관이 적지 않음에도 서둘렀다. 기왕 이전을 결정했다면 충분한 준비기간을 가져야 마땅한데도, 기어이 임기 첫날을 용산에서 맞았다. ‘나쁜 땅’ 청와대를 벗어나 ‘명당’ 용산에서 임기를 시작하겠다는 풍수지리적 고려가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용욱 논설위원

이용욱 논설위원

윤 대통령 부부가 천공·건진 등 무속인들과 가깝다는 소문도 불온한 의심을 키웠다. 윤 대통령 멘토를 자처하는 천공이 한 강연에서 “용산은 수도 서울의 최고의 땅” “용이 여의주를 물고 와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실도 회자됐다. 전문가들은 갑론을박했다. 용산 찬성론자들은 “물이 흐르는 청와대 자리는 땅이 차다. 땅이 차면 민심과 벽을 쌓게 된다”고 했지만, 반대 쪽은 “용산은 배산임수를 이루지 못하고, 외풍에 속수무책이다”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국민과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용산행을 결정했다고 했지만, 남은 것은 풍수 논쟁이었다.

그러나 용산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을 오가는 지지율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한국갤럽의 9월 첫째주 정례조사 결과는 뜯어볼 만하다. ‘인사’, ‘경험·자질 부족 및 무능함’ ‘경제·민생 살피지 않음’, ‘독단적·일방적’, ‘소통 미흡’, ‘전반적으로 잘 못한다’, ‘여당 내부 갈등’, ‘직무 태도’, ‘김건희 여사 행보’, ‘공약 실천 미흡’, ‘집무실 이전’ 등이 지지율 하락 원인으로 지목됐다. 경제고, 민생이고 다 못했다는 것이다. 용산은 명당이 아니라 흉지로 전락할 판이다. 천공의 예언은 틀렸다. 용이 물고 온 것은 여의주가 아니라 ‘체리따봉’이었다.

용산발 소식들은 흉흉하다. 집권 초 윤 대통령의 독선적 국정운영 논란이 일었다면, 최근엔 김 여사 관련 의혹들이 터져나온다. 김 여사가 고가 장신구를 재산신고에서 누락했다는 의혹이 나오고, 김 여사 일가 부동산 특혜 의혹을 수사하는 경찰관이 취임식에 초청된 사실도 확인됐다. 대통령실은 장신구는 지인에게 빌렸으며, 해당 경찰관은 청룡봉사상을 받아 초청됐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수천만원대 장신구를 빌리는 것도 상식 밖이고, 정당한 대가 없이 빌렸다면 ‘김영란법’ 위반일 수 있다. 봉사상 수상자 5명 중 3명은 왜 취임식에 초청받지 못했나. 수준 낮은 해명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대통령실 관계자들은 땅의 ‘나쁜 기운’에 홀린 것인가. 대통령실 행정관 50여명이 짐을 쌌다는데, 국정난맥에 책임이 큰 고위직 대신 힘없는 실무진이 집단으로 ‘살’을 맞은 꼴이다.

용산의 나쁜 기운은 여의도로 번졌다. 용이 떨어뜨린 체리따봉 폭탄에 국민의힘은 초토화가 됐다. 체리따봉에 분노한 이준석 전 대표는 자신을 몰아낸 윤 대통령과 윤핵관들을 연일 공격하고, 윤핵관들이 반발하면서 당은 시끄럽다. 한심한 자해극이다. 주호영 비상대책위원회가 법원의 직무정지 판결을 받았지만, 당은 당헌·당규를 고치는 꼼수를 부려 정진석 국회부의장을 비대위원장에 앉혔다. 돌고 돌아 윤핵관이 당 수습을 맡게 된 것이다. ‘윤핵관은 뒤로 빠지라’는 민심에 눈감고 귀닫은 것 아닌가. 장제원·권성동 의원은 2선 후퇴하겠다고 했지만, 이런 식이면 위장사퇴 의혹이 커질 수밖에 없다. 거대한 경제위기의 파고 속에서 집권세력의 혼란과 무능은 국가적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걱정스럽다.

사실 땅 문제는 위기의 본질이 아닐 것이다. 맹자는 “하늘의 때는 땅의 이로움보다 못하고, 땅의 이로움은 사람 사이의 화합만 못하다(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고 했다. 땅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하물며, 명당도 쓰는 사람의 그릇에 따라 흉지가 되는 법이다. 문재인 정부는 ‘사람이 먼저다’라고 했지만, 윤석열 정부에선 ‘사람이 문제다’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나라가 시끄러운 것은 정권 핵심 인사들의 잘못이지, 용산 땅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윤 대통령은 취임 100일 회견에서 “저부터 분골쇄신하겠다”고 했다. 국정의 무거움과 민의의 엄중함을 뼛속 깊이 새기는 것을 쇄신의 출발점으로 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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