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지역방송의 질 저하 불보듯

2011.12.01 21:35 입력 2011.12.02 10:03 수정
이영만 | 전국언론노조 대전방송지부장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말은 어렵지만 쉽게 풀면 나쁜 돈이 좋은 돈을 몰아낸다는 뜻이다. 지금 방송계 안팎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들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문장 아닐까 싶다. 태생부터 불법인 종합편성채널이 기존의 방송 질서와 미디어 생태계를 어지럽히고 있다. 정치권은, 특히 한나라당은 방송광고판매대행사(미디어렙) 관련 입법을 고의적으로 지연함으로써 ‘종편발 저질평준화’의 에너지를 제공하고 있다. 방송광고를 규칙 없이 거래하게 하자는 의도된 담합, 불순한 침묵이다. 방송의 공공성과 독립성, 다양성이라는 원칙이 돈의 논리에 쫓겨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슈가 바로 미디어렙인 것이다.

겨울 추위가 서민들 가슴팍에 먼저 오는 것처럼 모든 위기는 약자에게 먼저 닥치기 마련이다. 미디어렙 입법이 지연되면서 약자 매체인 지역방송이 또 한번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관련 법이 연내에 처리되지 않는다면 방송계는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길을 걷게 된다. 미디어 생태계 내에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지역방송은 방송재원 조달에 치명적인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전문가 기고]③ 지역방송의 질 저하 불보듯

사실 지역방송은 지난 십수년 동안 위기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방송권역 붕괴를 우려했다. 결과적으로 시장에서 퇴출되지 않았으므로 위기를 극복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역방송이 겪었던, 그리고 앞으로 겪을 위기는 교통사고가 아니라 당뇨와 같은 것이어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방송의 건강을 해친다. 노동법이 날치기 처리된 1996년에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이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것처럼 방송의 시장화는 조금씩 ‘작은 언론들’을 좀먹게 될 것이다. 방송이 상품으로, 방송사가 영리기업으로 인식되는 결과라면 그것은 위기 극복이 아니다. 방송다움을 포기하는 연명이야말로 그 자체로 심대한 재앙이다.

불 보듯 뻔하다. 지금과 같은 법적 공백이 지속된다면 지역방송에는 감원과 제작비 축소 등 내핍경영이 들불처럼 번질 것이다. 방송의 품질을 희생시켜 적자를 모면하려고 애쓸 것이다. 단순연명을 위한 경영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무용론이 나올 것이며 이 악순환은 계속될 우려가 크다. 충분한 방송재원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지역방송의 엥겔계수는 급상승할 것이며 고정비용을 충당하기에도 버거워할 것이다. 좋은 방송을 위한 투자는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지역방송이 지켜야 할 절대선(善)이거나 무슨 일이 있어도 내쫓겨서는 안될 양화(良貨)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방분권과 풀뿌리 민주주의, 지역민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대의를 위해 보호해야 할 가치가 충분한 매체임은 분명하다. 미디어 다양성에 존재적 기여를 하고 있다는 순기능도 부인할 수 없다. 지상파방송이 광고가 잘 팔리는 오락 프로그램만 편성할 수는 없듯이 방송 생태계에는 지역도 공생해야 한다. 지상파라면 보도와 교양, 다큐멘터리 등 시청률은 낮더라도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다양한 장르의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마찬가지 논리로 소위 경쟁력이 있다는 서울의 콘텐츠만 생존해서는 안된다. 지상파 채널이라면 생활의 터전인 각 지역의 여론을 형성하고 지역 시청자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공적 유기체를 구성하고 있는 지역방송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지역방송 스스로도 자구노력을 해야 한다. 생존과 연명이 아니라 지역방송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한 과감한 혁신을 시도해야 한다. 지역방송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는 비판이 나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역방송을 비롯한 중소매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방송의 공공성과 독립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당장 미디어렙법을 제정해야 한다. 재앙은 막아야 한다. 악화의 창궐이 초래할 하향평준화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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