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미 대사관저 방화사건 겪었던 그레그 전 대사 “정신이상 괴짜 범인의 주장 한국 내 그 누구도 대변 못해”

2015.03.06 22:29 입력 2015.03.06 22:37 수정

“사건 잘 처리 땐 동맹 강화”

주한 미국대사들 가운데 한국의 폭력시위의 직접 당사자가 되어본 사람은 아주 드물다. 도널드 그레그 전 대사(87·사진)가 그 중 한 명이다. 1989년 10월13일 새벽 사제폭탄을 든 대학생 6명이 서울 정동 미 대사관저 담을 넘어 건물에 들어갔을 때 그레그 대사 부부는 잠옷 바람으로 도망쳐야 했다.

1989년 미 대사관저 방화사건 겪었던 그레그 전 대사 “정신이상 괴짜 범인의 주장 한국 내 그 누구도 대변 못해”

그레그 전 대사는 5일(현지시간) 통화에서 “나는 당시 리퍼트 대사처럼 생명의 위협을 받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 대사관저를 침입한 대학생들 중 일부는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어 내게 사과했고, 나도 사과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당시 침입한 대학생들이 관저 한 쪽 방에 들어가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이려 했지만 내화성 재질 카펫 덕분에 불이 붙지 않았다. 당시 한양대 학생이던 정청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점거 농성자들 중 한 명이었다. 정 의원은 2006년 그레그 대사를 처음 만나 사과했다. 이 사건은 중앙정보국(CIA) 요원 출신인 그레그 전 대사에게도 한반도 문제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됐다.

이 사건 당시 부산 미 영사관의 영사였던 데니스 핼핀 존스홉킨스대 연구원은 그날 아침 서울 대사관으로부터 ‘급진적이고 반미적인 대학생들의 공격이 일어났으니 보안등급을 올리라’는 긴급전화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주한 미 대사를 지낸 캐슬린 스티븐스 당시 영사는 1980년대 대학생들의 미 대사관 시설 점거·방화가 잇따르자 부산 시내가 아닌 미군부대 캠프 하얄리야에서 살아야 했다. 89년 대사관저 점거농성 사건 이후 미 대사관 관련 건물이나 대사에 대한 공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2002년 미선·효순양 사건으로 반미시위가 활발히 벌어졌을 때에도 대사관 앞 1인시위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대사를 직접 겨냥한 이번 사건은 그레그 전 대사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레그 전 대사는 “이번 사건이 한·미동맹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오히려 이번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동맹 관계가 더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범인은 정신이 이상한 괴짜로 한국 내의 어떠한 사람들도 대변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김기종씨가 리퍼트 대사를 공격하며 “남북 통일” “한·미 군사훈련 반대”를 외친 것에 대해 그레그 전 대사는 “그가 무엇을 주장했는가에 상관없이 한국인들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려던 외국대사에게 칼을 휘두른 것은 한국 내 누구의 견해도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범인이 일본대사에게 돌을 던진 전력이 있는데도 제대로 된 관리나 경계가 없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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