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개혁·개방 ‘베스토니아 모델’로 갈까

2019.01.16 06:00 입력 2019.01.16 14:39 수정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9일 중국 베이징 외곽의 제약기업 동인당을 방문해 의약품 뚜껑을 열어보고 있다.    베이징 | AP연합뉴스 이미지 크게 보기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9일 중국 베이징 외곽의 제약기업 동인당을 방문해 의약품 뚜껑을 열어보고 있다. 베이징 | AP연합뉴스

# 2012년 7월25일 평양 능라인민유원지 준공식. 권좌에 오른 첫해 곱등어관, 문수물놀이장 등 새로운 위락시설을 만든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이날 직접 놀이기구를 탔다. 360도 도는 ‘회전매’라는 기구다. 고모인 김경희 노동당 비서와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 등도 함께했다. 김경희 등은 사색이 됐지만 28세(추정) 김정은은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다. 개혁·개방을 향한 그의 의지를 상징하는 단면이다.

# 지난해 7월 함경북도 경제시찰 현장.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언제(댐의 북한말)’ 건설을 시작한 지 17년이 되도록 70%밖에 진행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며 “벼르고 벼르다 오늘 직접 나와 봤는데 말이 안 나온다”고 격노했다. 이는 그가 내건 자강을 통한 발전이란 목표와는 뒤떨어진 냉엄한 현실의 벽을 보여준다.

그동안 김정은체제가 농업·기업 부문 개혁으로 사상 최고의 유엔 제재 아래서도 경제성장을 이뤘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자력으로만 ‘회전매’를 돌리기에는 벅차 보인다. 북한이 본격 개혁·개방 시 어떤 경로로 갈지 안팎의 관심이 쏠린다. 북한이 베트남식 개방과 에스토니아의 정보기술(IT)을 앞세운 발전 사례를 참고한 ‘베스토니아’ 모델로 갈 것이라고 전망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 베트남 모델에 ‘우리식’ 접목 전망

그간 김정은체제의 개혁은 ‘연명’ 수준일 뿐, 경제의 근본 회생과 도약으로 이끌기엔 한계가 있다. 한 탈북 경제전문가는 지난달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김정은이 북한에 ‘경제개발’을 처음 시작한 게 중요하다. 개발은 이전까지 북한말에 없었다. ‘발전’은 대체로 생산 증대를 뜻하고, ‘개발’은 국토를 완전히 뜯어고치는 다른 개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는 개혁·개방 전제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해석했다.

북한이 이미 개혁·개방의 길에 들어섰다는 평가도 나왔다. 22개 경제개발구가 대표적이다. 임강택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점·선·면 전략인데 그 점(개발구)이 생각보다 많다. 국경과 해안 지역은 거의 다 망라됐다”며 “사실상 전면적 개방 전략을 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핵 문제 등으로 외자 유치가 안돼 황무지 같은 경제개발구이지만 개방 밑그림은 내놨다는 해석이다.

■ 북 ‘자본 유치는 베트남, 기술 도입은 에스토니아’ 사례 주목

북한 ‘압축 성장’의 조건

북한의 개혁·개방 모델로는 중국이나 베트남이 흔히 거론된다. 두 모델의 가장 큰 차이는 외국자본 유치 방식과 규모다. 중국은 경제발전 과정 초반에 화교자본의 활용이 컸다는 것이 특징이다. 베트남은 민족자본이 적었기 때문에 일본 중심 차관 형태의 ‘대외원조’ 비중이 컸다. 북한은 어떻게 할까.

북한에 일종의 ‘민족자본’은 남한 자본일 수 있다. 예컨대 삼성 같은 대기업을 끌어와야 하는데 쉽잖을 수 있다. 북한도 베트남처럼 차관 등을 대거 받는 길을 걸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중국식이냐 베트남식이냐
리용호 “베트남 쇄신 배우고파”
미·중 간 외교 문제까지 얽힌 상황
일단 외국자본 차용 베트남식 유리
단 ‘정치적 자유 전제’가 북엔 부담

중국, 베트남 모델이 크게 보면 비슷하다는 평가도 많다. 발전모델 차이보다는 국제정치 관계가 더 중요할 수 있다.

특히 북한은 베트남과 가깝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월맹군 미그17 중대에 공군 조종사들을 파병하기도 했다. 리용호 외무상은 지난해 11~12월 베트남을 방문해 ‘도이머이(쇄신)’ 경제발전 모델을 배우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마크 내퍼 주한 미국부대사도 지난해 6월 한국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중국은 규모가 너무 크고 자급자족 성향이 강해 타국에 적합한 모델이 되기 어려울 것이고, 경제발전 경험과 규모도 다르기 때문에 베트남식 발전모델이 북한에 적합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런 배경에는 미묘한 외교관계가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은 G2로 급성장한 중국에 북한 경제가 종속되는 걸 원치 않는다. 베트남과 중국은 1970년대 국경분쟁까지 겪은 껄끄러운 관계다. 베트남은 미국과 1995년 수교 이후 경제가 급성장했다. 수출액이 1986년 도이머이 당시 7억9000만달러에서 2017년 2119억달러로 늘었다. 북한이 누구와 더 손잡을지는 동아시아 안보질서 재편과 연결된 셈이다.

다만 북한의 경제개발이 베트남 경로를 엇비슷하게 따른다는 보장은 없다. 일단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이라며 자체 모델을 추구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 베트남과 비교하기 어려운 유일지배체제라는 강력한 정치구조가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개혁·개방 시 집단지도체제에서 개혁파가 득세했다. 양운철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지난해 ‘베트남 개혁·개방 경험이 북한에 주는 정치경제적 함의’ 보고서에서 “베트남이 주는 교훈은 최소한의 정치적 자유가 허용돼야 경제가 크게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결국 유일지배체제와 지속적 경제성장이 양립할 수 있는지가 김정은체제의 큰 숙제로 남았다. 한 북한 경제 전문가는 “김정은이 현장에 가서 번번이 깨면 밑에 간부들은 끌려오기만 할 뿐, 스스로 그림을 확장하지 못한다. 사고구조 자체가 김정은과 다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김정은이 고독해 보인다”고 평했다.

‘e-스토니아’ 에스토니아
소련군 잠수함 만들던 약소국
2002년 전자카드 시스템 도입
스카이프·택시파이 등 벤처 탄생
1인당 국민소득 22년 새 5배 증가

[한반도가 경제다 ③]북한 개혁·개방 ‘베스토니아 모델’로 갈까

■ 에스토니아처럼 ‘단번 도약’하려면

북한이 문호를 연다면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성공한다고 장담키는 어렵다. 자칫 동구권처럼 공산당이 몰락하며 정권이 무너질 위험도 염두에 둬야 할 처지다.

만약 체제 전환에 연착륙한다면 북한은 단기간에 압축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면에서 최근 부쩍 거론되는 곳이 에스토니아다.

‘발틱 3국’의 하나인 에스토니아는 근래 들어 그냥 북유럽 국가로도 불린다. 역사상 옛 소련연방에서 1991년 독립한 에스토니아는 이후 유럽연합(EU)과 서방 안보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다. 인구 130만명에 국토는 남한의 약 절반인 에스토니아는 감자, 배추 정도 심는 가난한 소국이었다. 옛 소련 때는 부동항인 탈린항에 소련군의 잠수함을 만드는 기지가 있었다.

6년 전 한국에 온 에스토니아 ‘해방둥이’ 게를리 쿠르트(28)는 2017년 10월 서울에서 모국의 지방의회선거를 전자투표로 했다. 채 5분도 안 걸렸다. 그는 “은행 일이나 공항 입국, 납세, 공문서 등의 전자서명도 전자주민증(ID 카드)으로 한다”고 밝혔다. 쿠르트는 “2002년 ID 카드를 도입할 때 보안 문제를 걱정하기도 했지만 결국 정부에 대한 신뢰가 있어서 가능했다”고 말했다. 체제 전환에 성공한 에스토니아는 1인당 국민소득이 1995년 3000달러에서 2017년 1만9000달러로 5배 급증했다. 무료 통화서비스인 스카이프, 유럽판 우버인 택시파이(Taxify) 등이 에스토니아에서 나온 대표적인 벤처다. 에스토니아는 ‘e-스토니아’로 불릴 정도다.

에스토니아의 ‘가상거주권(e-레지던시)’ 사업을 하는 K챌린지 김원상 대표는 “북한은 해킹 같은 기술 수준이 높은 것으로 아는데 인프라로서 IT와 돈 버는 IT는 다르다”면서도 “잘하면 북한에 에스토니아식 모델 접목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국가 간 연결망 없이 스카이프 서비스가 가능했겠느냐”며 “북한이 개방에 초점을 맞추면서 해킹 같은 기술력을 상업화할 실력을 갖춰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게 북한의 장점
전 세계에 ‘입증’된 해킹 능력
이 고급인력들 ‘상업적’으로 쓰면
‘북한형 스마트시티’ 만들 수 있어

북한도 최근 짧은 기간에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이른바 ‘단번 도약’과 ‘최첨단 돌파’를 강조한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000달러대로 최빈국 수준인 북한 경제가 단기간에 도약할 복안은 뭘까.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상태 자체가 가능성으로 평가된다. 후발국은 앞선 경제발전 경로를 반복해서 성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방 구석구석까지 유선전화선을 모두 깔지 않고 곧바로 초고속 무선통신망을 구축하면 된다. 중국은 신용카드 단계를 사실상 건너뛰고 모바일 결제로 나아갔다.

북한의 소프트웨어 능력을 가늠케 하는 일화가 있다. 2017년 4월 북한 미사일 발사가 또 실패했다. 이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때인 2013년 북한 핵·미사일 개발을 막으려는 미국의 ‘발사 직전 교란(Left of Launch)’ 프로그램이 효과를 발휘한 결과일 수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미사일 발사 준비단계에 악성코드나 전자기파 공격으로 교란시켰다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후 미사일 발사가 성공한 사실을 들어 북한의 소프트웨어 기술이 뛰어나다고 평한다. 실제로 북한은 2014년 김정은 암살 소재 영화 <인터뷰>를 제작, 배급한 소니픽처스를 해킹해 컴퓨터 시스템의 약 70%를 망가뜨렸다.

북한의 도시 개발도 IT에 기반한 ‘스마트시티’로 갈 수 있다. 남북체육교류협회 김경성 이사장은 지난해 8월 국제유소년축구대회 참석차 평양을 방문해 20만㎡(약 6만5000평) 규모의 스마트시티 건설을 제안했다. 그는 “이는 2008년 1월 평양시 사동구역 장천동 일대의 50년간 사용권을 보장받은 35만㎡(10만6000평)의 4·25체육단 부지 중 일부”라고 밝혔다.

북한은 사회주의권에서도 가장 철저하게 계획경제를 추진해온 것으로 평가된다. 나사못 하나까지 계획에 따라 만들 정도로 사소한 부품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시스템이다. 부품이 잘못되면 전체에 문제가 생긴다. 정태인 통일연구원 초청연구위원은 “북한 생산성 정체의 원인이 이런 것”이라며 “김정은체제는 이런 계획경제가 아닌 부분, 즉 기존 시스템의 바깥에서 ‘시장경제’를 만드는 개혁을 통해 고급 인력을 첨단산업 등에 쏟아부어 단번에 돌파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 위원은 “북한이 순조롭게 체제 전환을 하도록 도와주는 게 남한의 역할”이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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