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총구 들이댔던 군인 만나고 싶다”

2021.05.17 16:22 입력 2021.05.17 22:54 수정

5·18 때 ‘김군’과 동행한 소년 시민군 최진수씨

검정고시 준비하다 공수부대 폭력 겪고 항쟁에 참여

“가해·피해 떠나 고백하고 용서 구하면 받아들일 것”

“머리에 총구 들이댔던 군인 만나고 싶다”

오른쪽 관자놀이에 닿았던 M16 소총 총구의 서늘함과 총을 겨눈 군인의 살기를 그는 한시도 잊지 못한다. 또한 그 총구를 내리도록 해 결국은 그의 생명을 구한 또 다른 군인의 선한 눈빛도 잊지 못한다. 1980년 5월, 최진수씨(58·사진)는 그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었다.

성난 공수부대원은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있던 이름 모를 시민군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댄 뒤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다음 차례는 최씨. “죽음을 목전에 두면 그동안의 삶과 보고 싶은 사람들 얼굴이 떠오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무 생각이 나지 않더군요.”

그때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 한 명이 다가왔다. 짧은 순간 총을 겨눈 공수부대원과 대위의 시선이 교차했다. 대위는 “여기서 이러지 말고 밖으로 끌어내라”고 말한 뒤 총을 치우라며 왼손을 내저었다. 총구는 내려졌지만 최씨는 양손이 등 뒤로 꺾인 채 포승줄에 묶였다.

41년 전 ‘소년 시민군’이었던 최씨는 지난 16일 “그날 만난 두 명의 군인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가해자·피해자 여부를 떠나 계엄군이 (그날의 폭력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17세이던 최씨는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전남의 한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가정형편이 어렵던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혼자 삶을 꾸렸다. 주소는 친척집에 뒀지만 셋방을 얻어 따로 지냈다.

그런 그가 ‘시민군’이 된 것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을 직접 경험하면서였다. 최씨는 5월18일 친구를 만나러 광주역으로 갔다가 당시 광주에 투입된 7공수와 맞닥뜨렸다. 대합실에 들어가려는 순간 출입구 앞 공수부대원이 그를 불러 세워 무작정 곤봉으로 내리쳤다. 30여분간 구타와 기합이 이어졌다.

공수부대원들은 최씨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다. 대검을 꺼낸 한 공수부대원은 장발이던 그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잘라냈다. 최씨는 다음날부터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최씨는 “평범했던 저를 5·18시민군으로 만든 것은 계엄군이었다”면서 “당시 공수부대에 폭행당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b>“동상의 손이 따뜻해”</b>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송암동에서 발생한 계엄군 양민학살 생존자인 최진수씨가 지난 16일 남구 광주공원 ‘김군’ 동상 앞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입장을 말하고 있다. 최씨는 학살 현장에 함께 있다 숨진 무명시민군(작은 사진) ‘김군’을 기리기 위해 지난해 직접 ‘김군’ 동상을 세웠다.

“동상의 손이 따뜻해”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송암동에서 발생한 계엄군 양민학살 생존자인 최진수씨가 지난 16일 남구 광주공원 ‘김군’ 동상 앞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입장을 말하고 있다. 최씨는 학살 현장에 함께 있다 숨진 무명시민군(작은 사진) ‘김군’을 기리기 위해 지난해 직접 ‘김군’ 동상을 세웠다.

“나 대신 죽은 ‘김군’ 시신 찾아야…계엄군 증언이 가장 중요”
‘송암동 양민 학살’ 생존자 최진수씨, 계엄군에 ‘화해의 손’

옛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현장을 직접 보게 된 최씨는 시민군이 됐다. 당시 도청 인근 남금동 셋방에 살던 그는 5월21일 오후 1시쯤 집에서 수백발의 총성을 들었다. 그는 그날 오후 늦게 시민들이 나눠주는 총을 받아들었다.

5월23일 최씨는 도청에서 20대 무명시민군 한 명을 봤다. 최씨는 5월24일 이 시민군과 광주 남구 송암동으로 향했다. 오전 11시쯤 도청 상황실에 “송암동에 계엄군이 나타났다”는 연락이 오면서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시민군 10여명을 태우고 도청을 출발한 트럭은 곧장 현장으로 가지 않고 광천동과 백운동 등 도심 여러 곳을 돌았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야 트럭은 송암동 인근에 도착했다. 효덕동 삼거리 작은 구멍가게 앞에 나와 있던 주민들이 멈추라는 급박한 손짓을 보냈다.

화물칸에 탔던 최씨가 트럭을 세웠다. 삼거리에서 동구 지원동 주남마을을 출발한 11공수부대 행렬을 이끌던 장갑차가 방향을 틀고 있었다. 트럭에서 내린 최씨와 무명시민군, 박모씨 등 세 명은 인근 민가로 급히 몸을 숨겼다. 트럭은 다시 시내 쪽으로 돌아갔다. 얼마 뒤 집 밖에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격렬한 총격 소리가 40여분간 이어졌다. 광주 봉쇄를 위해 송암동 인근에 매복해 있던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교도대가 주남마을에서 광주비행장으로 철수하던 11공수 병력을 시민군으로 오인해 서로 교전을 벌였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오인사격으로 수십명 사상 후
군인들, 마을서 ‘화풀이 처형’

먼저 나선 김군 총 맞은 후
내 관자놀이 겨누던 군인과
이를 말리던 장교 잊지 못해

이날 오인사격으로 11공수부대원 9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수십명이 다쳤다. 흥분한 공수부대는 화풀이로 마을을 수색해 젊은 사람들을 끌어내 처형하기 시작했다. 최씨 일행이 숨은 집도 공수부대원이 에워쌌다. 그때 무명시민군이 부엌과 방으로 연결된 문을 통해 최씨가 숨은 안방으로 들어왔다.

최씨가 “어디 숨어 있다 왔느냐”고 묻자 그는 “정개(부엌의 전라도 사투리)에 있었네”라고 했다. 그의 몸통은 갈비뼈가 앙상했다. 최씨는 “‘참 못 먹었구나’라는 생각에 서글펐다”고 했다. 밖에서 공수부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빨리 나와.”

무명시민군과 최씨, 박씨가 마루에 섰다. 총을 겨눈 30여명의 눈동자가 일제히 그들에게 꽂혔다. 살기등등한 계엄군을 보며 누구도 마당에 발을 내딛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무명시민군이 먼저 내려섰다. 공수부대 부사관 한 명이 “뭐야 이 새끼”라고 하며 그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총알을 박았다.

최씨는 이 총알이 관통해 1m쯤 뒤에 선 자신도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총알은 시민군의 머리에 박혔고 부사관은 다시 최씨에게 총구를 들이댔다. 하지만 이를 목격한 한 장교의 제지로 그는 목숨을 건졌다. 그날 송암동 지역에서 11공수에 학살된 시민은 최소 7명이다.

국가폭력 맞선 ‘수많은 김군’
사라진 시신 찾아 돌려줘야

최씨는 2019년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을 통해 자신이 머뭇거릴 때 먼저 마당에 내려섰던 이가 아직도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무명시민군 ‘김군’임을 알게 됐다. 최씨는 “그때 내가 먼저 마당에 나갔다면 처형된 사람은 나였을 것”이라면서 “김군이 대신 죽은 것”이라고 했다.

계엄군에 붙잡힌 뒤 수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최씨의 머리 위로 그날 오후 늦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광주 남구 광주공원 계단에 서 있는 김군 동상 어깨에도 지난 16일 빗줄기가 쏟아졌다.

이날 김군 동상을 찾은 최씨는 “그날도 이렇게 비가 왔다. ‘억울한 시민의 죽음에 하늘도 울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김군 동상은 최씨가 5000만원을 은행에서 대출받아 지난해 시민군 탄생지였던 광주공원에 세웠다.

살아남은 최씨는 그동안 무명시민군 김군의 시신을 찾는 데 인생을 바쳤다.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에 자진해 증인으로 섰고,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도 조사를 요청했다. 2015년에는 사비 500만원을 현상금으로 내걸기도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광주와 애써 거리를 두며 40여년간 매년 5월24일 혼자 김군을 기려왔던 최씨는 이제 ‘수많은 김군’을 위해 또 한번 용기를 내기로 했다. 시민군에게 총구를 겨눴던 계엄군을 용서하기로 한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지난 12일 1년여간의 조사 결과를 설명하면서 송암동 지역에서 김군처럼 계엄군에 살해된 뒤 행방을 알 수 없는 시신이 최소 8구라고 밝혔다. 광주 전체로는 최소 55구에 이르는 사살된 시민들의 시신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5·18은 국가폭력에 저항했던 수많은 김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최씨는 “이제 김군처럼 시신이 사라진 이들의 육신을 찾아 되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최씨는 5·18 때 사라진 시신을 찾기 위해서는 당시 현장에 있었던 계엄군의 증언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모두 용서할 수 있다고도 했다.

최씨는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들에게 적개심을 가진 적은 없다. 그들도 잘못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명령에 따라 움직였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면서 “그날 내가 만난 두 군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반드시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5·18진상규명조사위는 “200여명의 계엄군이 용기 있는 고백과 증언을 하고 있고 피해 유가족을 만나 사죄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사례도 늘고 있다”면서 “진실을 고백하니 마음이 좀 가벼워진다는 계엄군도 많다. 진정한 화해와 화합의 길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김군 동상 손바닥에 누군가 올려둔 동전 몇 개를 본 최씨가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고 손에 무엇인가를 쥐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다행입니다. 이제는 이 손에 제발 그의 육신이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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