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결코 사소할 수 없는 ‘소수적 감정’

2021.08.20 14:23 입력 2021.08.20 21:15 수정

마이너 필링스

캐시 박 홍 지음·노시내 옮김|마티|276쪽|1만7000원

지난 3월20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다 시내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범죄를 멈추라는 시위(#STOP ASIAN HATE)가 열리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3월20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다 시내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범죄를 멈추라는 시위(#STOP ASIAN HATE)가 열리고 있다. EPA연합뉴스

‘마이너 필링스(minor feelings).’ 직역하면 ‘사소한 감정’으로 풀이되는 말이지만, 마이너리티(minority)의 맥락과 맞물리면 ‘소수적 감정’으로 옮길 수 있다. 캐시 박 홍(45)의 에세이 <마이너 필링스>는 저자가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살아오면서 스스로도 외면해 왔던, 그러나 결코 ‘사소’할 수 없는 그 감정들과 대면하며 써내려간 기록이다.

저자는 ‘소수적 감정’을 인종적인 맥락에서 설명한다. 그것은 누적된 차별과 배제의 경험이 소수자 자신에게조차 내면화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인종차별이 분명한 어떤 모욕을 당했는데도, 그렇게 느끼는 것은 혹시 나의 피해망상이 아닐까 자기검열하는 식이다. 이 ‘소수적 감정’들은 삼키고 있을 때 개인에게 상처가 되고 삶을 뒤흔들지만, 그것을 표출했을 때는 “도가 지나치다”며 쉽게 혐오의 표적이 되곤 한다.

저자 캐시 박 홍은 한국계 이민 2세대로, 미국에서 나고 자란 시인이다. 그는 자신의 나라에서 이방인처럼 살면서 느낀 감정, 자기 혐오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낱낱이 꺼내 들여다본다. 그는 “나는 백인의 환심을 사도록 양육되고 교육받았으며, 환심을 사려는 이 욕망이 내 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고 말한다.

그간 미국 내 아시아계 차별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과 비교할 때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아시아계에게는 ‘모범 소수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고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미국 사회에 동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아메리칸드림’의 표상처럼 활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모범 소수자’라는 이미지는 사실상 ‘환상’에 가깝다고 저자는 말한다. ‘동화(同化)’를 ‘권력’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이런 고정관념을 받아들였지만, 백인우월주의 위계질서에서 봤을 때 모범 소수자라는 고정관념은 아시아인이 백인만큼 우등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시아인이 흑인과 비교했을 때에 한해서만 우등하다는 의미였다.”

오히려 저자는 아시아계가 미국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invisible) 인종’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진정한 소수자로 간주될 만한 존재감조차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면성을 발휘하면 존엄성으로 보상받으리라 믿고 묵묵하게 열심히 일하지만, 근면은 우리를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 뿐”이라는 뼈아픈 자각이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미국에서 획득한 평등은 대부분 흑인 민권운동에 빚지고 있지만, 흑인에 대한 인종주의가 오늘날 미국 내 한인사회와 한국에 여전히 널리 퍼져 있는 점도 지적한다. 인종차별의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해자인 셈이다.

지난해 2월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은 코로나19 확산과 맞물려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 범죄가 늘어나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저자는 코로나19 대확산 이전에도 미국 사회의 아시아계 혐오 정서는 강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미국 땅에 처음 도착한 중국인 이민자들이 잔인하게 착취당하고 죽임을 당한 18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유구했으며, 인종주의는 그때그때 역사적 상황에 맞춰 변주됐을 뿐이라는 것이다.

[책과 삶]결코 사소할 수 없는 ‘소수적 감정’

책에는 유색인종 여성 시인으로서 존재를 자꾸만 삭제당하는 현실과 글쓰기에 대한 고민도 담겼다. 그는 “정체성 정치만 내세우는 흔해 빠진 시인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분투해 왔다고 말한다.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한 유색인종 작가들 중에는 ‘정체성주의자’라는 낙인이 싫어서 자신의 작품에서 인종적 요소를 말끔하게 지워버린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아시아계였다. 인종적 정체성을 작품에 담더라도 미국 문학계에서 살아남고 인정받기 위해선 ‘백인 청중’의 구미에 맞는 인종 서사로 자신의 삶을 삭제해야 했다. 그것은 진보 성향 백인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발현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작품 속 트라우마의 직접적인 배경은 미국 사회가 아니라 작가의 사적인 것-이를테면 가부장적인 아버지나 머나먼 고국의 비극적 역사 등-이어야 했다.

저자는 “소수민족에 속한 작가들의 문학 활동은 예나 지금이나 본인들도 고통을 느끼는 인간임을 백인 세계에 증명해야만 하는 일종의 인본주의 프로젝트”라고 꼬집는다.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아프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그러므로 내 책은 통증의 강도에 따라 평가받는다. 강도가 2라면 굳이 내 얘기를 풀어놓을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 만약 10이라면 아마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책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도 줄곧 외부인이었던 여성 작가가 자신의 삶을 통해 ‘보편’이란 서구의 파괴적 유산에 균열을 내는 분투의 기록이기도 하다. 저자는 백인의 시선으로 내면화한 자기 혐오, 자신을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인정받고 싶어했던 욕구,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어 스스로 외면해온 감정들을 낱낱이 털어놓는다. 그 혼란과 모순의 감정들을 똑바로 바라보는 과정을 지나, 저자는 이제 “보편성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다”고 선언한다. 이제 보편적인 것은 ‘백인성’이 아니라 ‘차단된 상태’에 처한 ‘비백인’이라고 호명한다. 분노와 성찰로 벼려낸 송곳 같은 책이다. 이 목소리는 결코 ‘마이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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