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폭, 학폭, 검폭

2023.03.10 03:00 입력 2023.03.10 03:05 수정

‘조폭’을 뿌리 뽑겠다며 범죄와의 전쟁을 치른 게 언제였던가. 건폭! 학폭! 검폭! 온 나라에 때아닌 온갖 ‘조폭 담론’이 난무하고 있다. 시작은 건폭. 지난해 12월부터 경찰은 건설 현장을 정상화하겠다며 건설노조에 협박당한 사례 신고를 받았다. 올해 1월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건설노조에 저주를 퍼부었다. “경제에 기생하는 독”, “조폭들이 노조 탈 쓰고 설쳐”, “노동자들의 빨대”.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지난달 21일 윤석열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생중계한 국무회의에서 건설노조를 비판했다. “건설현장의 갈취폭력 등 조직적 불법 행위에 대해 검찰, 경찰, 국토교통부, 고용노동부가 협력해 강력하게 단속하라.” 이어 ‘건폭’이라는 신조어까지 동원해서 “건폭이 완전히 근절될 때까지 엄정 단속해 건설 현장에서의 법치를 확고히 세우라”고 지시했다.

‘건설노조는 조폭이다!’ 은유는 다르게 보이는 것들을 유사성을 고리 삼아 연결하는 수사 장치다. 건설노조와 조폭은 다르게 보이지만, ‘갈취폭력’이라는 유사성으로 엮인다. 원래는 다르게 보이는 것들에서 유사한 것을 뽑아 엮으려니 의미의 긴장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건설노조와 조폭이 따로 있을 때는 생길 수 없던 새로운 의미와 감정을 창출한다. 악에 대한 혐오감! 건폭을 몰아내는 것이 보수 정부의 사명이다. 현대사회와 같이 복잡한 사회에서는 정치적 결정을 수행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수단인 관료제가 필수적이다. 관료제는 ‘법의 기술’을 활용하는 관료가 필요한데, 대표적인 게 검찰이다. 합리적인 관료제인 검찰은 건폭을 몰아내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건폭 은유의 의미 효과는 대단했다. 단박에 대통령 지지율이 40%대로 올라섰다. 하지만 그 힘은 오래가지 못했다. ‘학폭’ 논란이 터지더니 ‘검폭’ 논의로 번졌기 때문이다. 정순신 변호사가 국가수사본부장에 지명된 지 하루 만에 물러났다. 검찰 출신이 경찰의 고위직을 맡는 게 바람직하냐는 논란이 일었지만, 곧 가라앉을 것처럼 보였다. 고등학교 시절 아들의 폭력 사건이 드러나자 상황이 바뀌었다. 학폭 그 자체보다는, 이를 덮기 위해 현직 부장검사인 아버지가 ‘법의 기술’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한 게 문제였다. 아들은 강제전학 징계를 받았음에도 반년 이상 학교에 남을 수 있었다. 학교폭력으로 처벌을 받으면 기록이 남아 대학진학에 불리할 수 있어 그리한 것이라는 전문가의 진단이 나왔다. 그 덕분인가, 서울대에 별탈 없이 합격했다. 반면 피해 학생은 정신과 치료를 받다 자살 시도까지 했고 대학도 제때 가지 못했다. 사람들은 분노했다. “검사는 다 뇌물받고 하는 직업이야.” “아빠 아는 사람 많은데 아는 사람이 많으면 좋은 일이 일어나.” 아들이 평소 아빠 자랑을 하고 다녔다는 증언이 전해지자 의구심이 솟구쳤다. 이쯤 되면 조폭과 무엇이 다른가? 건폭, 학폭, 검폭이 지닌 의미의 변별성이 흐릿해졌다.

“폭력과 불법을 알면서도 방치한다면 국가라고 할 수 없다.” 윤석열 대통령의 말이다. 맞다,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 관료조직이다. 모든 사적 폭력을 금지해서 내전을 끝장낸다. 이제 싸움은 정치 게임이 된다. 한번 패했다고 해서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 다시 누가 합법적 폭력을 정해진 기간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다툰다.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가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인 이유다. 관료제의 최고자리는 항상 비관료 인물을 뽑는다. 법의 기술이 아니라 ‘법의 정신’으로 통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법의 정신은 ‘시민 연대’다. 카스트처럼 사회적 위계가 바로 정치적 위계로 나타나지 않도록 힘쓴다. 낮은 사회적 위계에 있는 특정 집단을 ‘주적’으로 내몰지 않는다. 군사 언어 대신 시민 언어를 써서 설득한다. 험난한 과정이지만 이 덕분에 폭력 대신 정치의 장이 열린다. 정치적 희망을 본 집단들도 시민 언어를 배워 대화에 나선다. 이른 봄날, 전쟁이 아니라 정치를 보고 싶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