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라덴 사살

재벌가의 ‘귀공자’가 ‘최악의 테러리스트’로

2011.05.02 22:03 입력 2011.05.02 22:54 수정

극과 극 평가 ‘빈 라덴’은


오사마 빈 라덴이 1988년 아프가니스탄 잘랄라바드 인근의 한 동굴에서 앉아 미소를 짓고 있다. | AFP연합뉴스

오사마 빈 라덴이 1988년 아프가니스탄 잘랄라바드 인근의 한 동굴에서 앉아 미소를 짓고 있다. | AFP연합뉴스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54)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2001년 9·11 동시다발 테러 사건을 계기로 그에게는 ‘최악의 테러리스트’라는 악명이 따라붙었지만, 일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그를 ‘수호자’이자 ‘영웅’으로 추앙했다. 하지만 숱한 사람의 무고한 인명을 희생시킨 ‘범죄자’란 점에서 비난의 표적이 돼왔다. 은거와 비밀로 점철된 그의 삶에 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이다.

■ 사우디 귀공자에서 ‘이슬람 전사’로

소련, 아프간 침공 때 투쟁 주역으로 변모, 이슬람 전사의 길로

통칭 ‘오사마 빈 라덴’으로 알려진 그의 본명은 ‘오사마 빈 무함마드 빈 아와드 빈 라덴’이다. 빈 라덴은 1957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 태어났다. 부친 모하메드는 사우디 도로 건설의 80%를 책임졌던 건설 재벌이었고, 빈 라덴은 모하메드의 자녀 52명 가운데 17번째였다. 수니파 무슬림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빈 라덴은 사우디 제다에 있는 킹 압둘 아지즈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17세 때인 74년 첫 번째 아내 나즈와 가넴과 결혼했으며 이후 다른 4명의 아내를 맞은 것으로 전해진다.

청년 빈 라덴의 인생이 전환점을 맞게 된 계기는 79년 말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었다. 아프간이 소련 수중에 떨어지자 그는 곧바로 현지로 달려가 아프간 무자헤딘과 함께 반 소련 지하드(성전)에 참여한다. 당시 미국은 막대한 자금과 군사장비, 정보 등을 제공해 이슬람 전사들을 훈련시켰다. 훗날 빈 라덴을 ‘제거 대상 1호’로 올려놓은 미국이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를 ‘이슬람 전사’로 키운 셈이다.

빈 라덴은 자신의 재산을 기꺼이 투쟁자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빈 라덴은 68년 헬기 사고로 사망한 부친으로부터 2억5000만달러(현 환율로 약 2662억원)가량의 유산을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빈 라덴은 88년 대소련 성전에 참여한 이슬람 전사들을 규합, ‘성스러운 이슬람 제국 건설’ ‘이슬람의 전파’ 등을 목표로 알카에다를 창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89년 소련이 아프간에서 철수하자 그는 사우디로 돌아온다.

[빈 라덴 사살]재벌가의 ‘귀공자’가 ‘최악의 테러리스트’로

■ 증오의 표적, 소련에서 미국으로

미군 사우디 주둔에 분노, 92년 수단으로 망명“미국이 이슬람의 적”

소련에 대한 증오가 미국에 대한 적개심으로 바뀐 계기는 걸프전 당시 사우디 정부가 미군의 주둔을 허용한 것이었다. 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사우디는 이교도인 미군 30여만명의 주둔을 허용했다. 더욱이 미군 주둔지 두 곳은 이슬람의 ‘성지’였다. 빈 라덴은 미군의 신성모독에 대해 복수하기로 결심한다. 이후 사우디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자 92년 가족을 데리고 수단으로 망명한다. 그는 수단 수도 하르툼에 이슬람 전사 훈련소를 세우면서 입지를 강화한다. 아랍권의 친미 정권을 비난하고 대미 성전 촉구를 본격화한 것도 이즈음이다.


2001년 6월 공개된, 아프가니스탄 알파루크에서 사격훈련을 받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의 모습. | AFP연합뉴스

2001년 6월 공개된, 아프가니스탄 알파루크에서 사격훈련을 받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의 모습. | AFP연합뉴스

그는 알제리의 이슬람 무장단체를 지원하는 동시에 구호를 명분으로 소말리아에 상륙한 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 99년 알자지라 방송 인터뷰에서 그는 “소말리아에서의 전투를 통해 우리는 미군의 나약함을 알았다”고 말했다. 95년 미국이 운영하는 리야드 군사훈련센터와 파키스탄 주재 이집트대사관 폭탄테러를 주도한 혐의를 받으면서 이듬해 수단으로부터도 쫓겨난다. 이후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간으로 들어가 알카에다 활동을 본격적으로 벌인다. 산악지대에 첨단장비를 갖춘 사령부를 세우고, 이슬람권을 중심으로 국제적 조직망을 구축했다.

미국을 “이슬람의 적”으로 강조해온 그는 97년 CNN과의 인터뷰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이라고 공언했다. 98년 “이슬람의 신성을 훼손하는 미국과 미국인, 그 동맹국 군인, 시민 등에게 죽음을 선사하라”는 내용의 칙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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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끊임없는 추적에도 건재 과시

서방국 끈질긴 추격… 사망·체포 오보 때마다 영상 통해 건재 과시

빈 라덴의 이름이 국제사회에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2001년 9·11 테러 때였다.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사건 발생 직후 즉각 보복을 선언하고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빈 라덴이 9·11 테러의 핵심 배후라는 판단 아래 미국은 알카에다의 거점인 아프간 침공에 나섰다. 그러나 그가 9·11 테러를 직접 지시·조종했다는 정황만 있을 뿐 직접적인 증거는 아직 없다. 실제 미 연방수사국(FBI)의 ‘우선 수배자 명단’에 그가 올라 있지만 혐의는 ‘9·11 테러’가 아닌, 95년 리야드 군사훈련센터 폭탄테러와 98년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 대사관 테러 등이다.

미국은 9·11 테러 직후 빈 라덴과 알카에다를 핵심 용의자로 지목하고 현상금 2500만달러(약 266억원)를 내걸었다. 최근까지도 최첨단 장비를 갖춘 미국 및 서방국 정보요원들과 상금을 노린 국제적 ‘인간 사냥꾼’들은 그의 흔적을 찾아 맹렬한 추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사망설이 숱하게 나돌았지만, 그때마다 비디오테이프를 통한 연설로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 2인자 아이만 알 자와히리(오른쪽)가 2001년 10월 나란히 앉아 있다.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 AP연합뉴스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 2인자 아이만 알 자와히리(오른쪽)가 2001년 10월 나란히 앉아 있다.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 AP연합뉴스

빈 라덴은 수많은 메시지를 통해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곤 했다. “나는 미국인을 죽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를 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국 BBC 방송은 2일 “케냐·탄자니아대사관 테러 당시 희생된 사람 대부분은 미국인이 아닌 아프리카인이었다”며 “그의 주장은 공허한 울림이었다”고 꼬집었다.

원리주의자들의 조직적인 후원과 반미 무슬림들의 비호를 등에 업고 신출귀몰했던 빈 라덴은 결국 CIA와 미군 특수부대의 치밀한 작전에 휘말리면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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