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현지르포

“여보 기다릴게…” 피난소엔 소리없는 통곡 가득

2011.03.16 21:34

윤희일 기자 센다이 피난소 르포


<b>남은 건 애견 한마리 뿐</b> 대지진으로 집과 친구들을 잃은 이시이 레이코가 16일 애견 보브를 껴안고 센다이 시내 시치고(七鄕)초등학교에 마련된 대피소 연락판에서 친구들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센다이 | 윤희일 기자

남은 건 애견 한마리 뿐 대지진으로 집과 친구들을 잃은 이시이 레이코가 16일 애견 보브를 껴안고 센다이 시내 시치고(七鄕)초등학교에 마련된 대피소 연락판에서 친구들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센다이 | 윤희일 기자

▲“살아 있어야해, 꼭 연락해”
알림판엔 사연들 빼곡… 타인 배려 대부분 ‘짤막’

40대 남자가 피난소로 쑥 들어왔다. 머리에는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 이후 방사성물질에 오염된 비나 눈을 피하기 위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입고 있는 것과 달랐다. 남자는 뒤집어쓴 눈도 털지 않고 ‘연락판’으로 달려가 수백개의 사연을 꼼꼼히 읽었다.

3개의 흰색 칠판을 이어붙인 연락판에는 갖가지 사연이 빼곡했다. 남자는 10여개의 교실에 마련된 피난소를 모두 돌았지만 피난자 명단 어디에도 그가 찾는 가족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누구를 찾느냐’고 묻자 대답도 하기 전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그는 울지 않았다. 울음을 어렵게 안으로 삼켰다.

“지진 이후 아내와 아들의 행방을 백방으로 찾았지만 확인 못하고 있어요. 아내와 아들이 나를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잠시도 앉아 있을 수가 없어요.”

16일 오전 11시 일본 센다이(仙台)시 와카바야시(若林)구 로쿠고(六鄕)초등학교에 마련된 피난소. 쓰나미가 몰아닥치면서 무려 300여명이 희생된 아라하마(荒浜) 일대 피난민 1300여명이 생활하고 있다. 피난소를 짓누르고 있는 거대한 쓰나미의 공포 위로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그래서 피난소는 더욱 추웠다.

“나카타니씨 살아있지요. 꼭 살아있을 것으로 저는 믿어요. 저는 피난소에 있으니까, 꼭 연락해주고요.” 피난소에 나붙은 사연은 모두 짧다. 대부분 이름과 연락처만 적어놨다. 길어야 두세 문장이다.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일본인들답다.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지요. 연락판이 너무 좁기 때문에 너무 길게 쓰면 꼭 필요한 사람이 쓸 수 없으니까요.”(50대 피난민) 그러나 그 짧은 사연 하나하나에는 눈물이 배어 있다.

▲ 대피자수 60만명 육박…“가족 생각하면 쉴 틈 없어”
많은 사람들 피난소 순례

“여든이 넘은 나이에 이 세상에 딱 혼자만 남겨진 기분입니다. 아픈 무릎을 이끌고 하루에 3곳씩 돌아다니기 때문에 이제야 15곳 정도밖에 못 돌았어요. 평생을 함께해오던 노인회 친구 6~7명의 연락이 모두 끊겼거든요.”

인근 시치고(七鄕)초등학교의 대피소 연락판 한편에 “이시이는 잘 있어. 휴대전화로 연락해”라는 짤막한 글을 적어놓고 자리를 뜨는 이시이 레이코(82)도 주르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이시이는 지난 11일 지진 당일 옆집 주민이 제공한 자동차를 이용해 쓰나미가 닥치기 5분 전에 11살짜리 애견 보브와 극적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남은 것은 자신의 몸과 애견 보브뿐.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매일같이 함께 어울리던 친구는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시이는 “매일 저녁 보브를 껴안고 잠자리에 들지만 지진의 충격과 꿈에 나타나는 친구들의 모습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며 “그들의 생존 여부가 확인될 때까지 피난소를 돌며 찾아보고 글을 남길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번 지진에 따른 대피자 수가 60만명에 육박하고 있는 가운데 각 피난소마다 가족이나 친지를 찾기 위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또 이들이 남긴 사연이 하나둘 쌓여가면서 연락판이 꽉꽉 차고 있다. 그만큼 애타는 가슴이 늘어나는 것이다.

센다이 지방 라디오방송은 가족이나 친지를 찾는 주민들의 사연만을 하루종일 내보내고 있다. 그러나 지진 현장에서 ‘살아있다’는 소식보다는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는 소식이 몇 십배, 몇 백배 많아지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피난소 곳곳에서는 절망 섞인 탄식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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