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신화’가 깨졌다, 일본인 ‘확실성’이 사라졌다

2011.03.16 21:16 입력 2011.03.16 23:25 수정
구정은 기자

‘매뉴얼’ 벗어난 재앙에 정부 대처 갈팡질팡

감정 억누르는 시민들, 속으로는 불신·불안

생활 지배해온 질서·예측 가능성 모두 ‘흔들’


<b>남매는 무슨 생각 할까</b> 지진과 쓰나미를 피해 부모와 함께 친척집으로 대피한 어린 남매가 지난 15일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의 철길에 앉아 있다.  이시노마키 | AP연합뉴스

남매는 무슨 생각 할까 지진과 쓰나미를 피해 부모와 함께 친척집으로 대피한 어린 남매가 지난 15일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의 철길에 앉아 있다. 이시노마키 | AP연합뉴스

성실함, 근면성, 정교함, 안전.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세계가 떠올리는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일본의 신화는 깨졌다. 2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일본의 ‘경제 신화’는 1990년대 이후 거품 붕괴와 ‘잃어버린 10년’을 지나면서 깨져나갔다. 2009년 일본의 자랑 도요타의 위상을 추락시킨 리콜 사태는 일본 제조업의 ‘품질 신화’를 깨뜨렸다.

그리고 2011년, 도호쿠 대지진으로 촉발된 원전 사고는 일본의 ‘안전 신화’까지 무너뜨리고 있다. 더 이상 일본에 대한 ‘신화는 없다’.

“시계가 필요없을 정도로 정확히 시간 맞춰 도착하는 열차, 1분만 연착해도 사과하는 안내원.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출근길 시민들은 행여 전철이 끊길까 종종걸음을 친다. 가게에는 식료품이 품귀현상을 빚고, 총리가 나서서 ‘침착해달라’고 호소하는 실정이다. 유리창이 여진에 덜컹거리면 국민들의 신경이 곤두선다.” 뉴욕타임스는 15일 “일본의 현대를 특징지운 ‘확실성’은 끝났다”는 기사를 실었다. 일본인의 생활을 지배해온 질서와 예측가능함이 이번 위기로 모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일본을 특징짓는 단어는 ‘통제 불가능’이다. 도쿄 북쪽 후쿠시마현에서는 원전 노동자들이 ‘멜트다운(원자로 용해)’이라는 재앙을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같은 시각 도쿄 시민들은 정부의 발표를 믿어야 할지 몰라 불안해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일본인들은 어릴 적부터 훈련받았던 대로 하려고 애쓴다. ‘최선을 다하라.’ ‘집단을 위해 감정을 억누르라.’ 하지만 마음속엔 불신과 두려움이 가득하다. “인터넷으로 계속 뉴스를 체크해요. 하지만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정부는) 괜찮다고 하는데 상황은 나빠지니.” 요코하마에 사는 회사원 도키와 신야는 뉴욕타임스에 “도망치고 싶어도 일을 해야 하니 어디로 떠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일본은 더 이상 ‘안전과 신뢰의 상징’이 아닌 ‘불신의 대상’이다. 원전 사고에 대한 일본 정부의 미숙한 대처와 불투명한 태도가 불신을 부르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은 일본이 주변국에 핵 공포를 퍼뜨리는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지진 뒤 13개국으로부터 긴급구조팀을 지원받았다. 파괴된 원전 주변에는 ‘비행금지구역’이 선포됐다.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 압박수단으로 거론되던 ‘비행금지구역’이라는 용어는 며칠 새 일본 원전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말이 됐다.

지금의 일본인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피폭을 책으로만 읽은 세대다. 가장 최근의 대참사였던 1995년 한신 대지진도 수도권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도쿄 시민들에겐 이번 사태가 ‘새롭고 거대한 재앙’으로 여겨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본인의 에토스(심리)에 깊이 새겨져 있는 ‘가망(참을성)’이 또 다른 트라우마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임상심리학자 히라카와 스스무는 “눈앞에서 가족이 파도에 쓸려가는 것은 인내하고 참기엔 너무나 고통스러운 경험”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사회를 통칭 ‘매뉴얼 사회’라 부른다. 매뉴얼에 충실함으로써 품질·안전 신화를 만들어왔지만 매뉴얼의 범위를 넘어선 것에 대해서는 대처 능력을 잃기 때문이다. 일본 원전회사들의 매뉴얼은 쓰나미 파고가 10m에 이를 경우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최고 24m에 이르는 쓰나미를 만나자 정부도, 전력회사도 갈팡질팡하고 있다.

에다노 유키오 관방장관은 성실히 기자회견을 하고 있지만 그가 발표하는 내용은 불확실하다. 간 나오토 총리는 “폭발이 일어나고 1시간이 지나도록 보고조차 올라오지 않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신화가 깨져나간 일본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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