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모리스, 호주 ‘금연정책’에 제동… 공공정책 위협 현실로

2011.11.22 21:36 입력 2011.11.23 01:09 수정
조홍민·최민영·목정민 기자

담뱃갑 디자인에 반발

다국적 담배회사가 국민의 건강권을 보호하려는 국가를 상대로 법적 싸움을 걸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규정된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가 빌미가 됐다.

다국적 담배회사 필립모리스는 지난 21일(현지시간) “밋밋한 담뱃갑이 흡연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란 사실을 입증할 수 없음에도 호주 의회가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다”며 홍콩에 있는 필립모리스아시아(PMA)를 통해 국제중재 통지서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호주 의회는 최근 모든 담뱃갑에 밋밋한 배경색과 똑같은 글꼴 표기 및 로고 삭제를 의무화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내년 12월부터 시행된다.

호주 의회가 지난 21일 통과시킨 새 금연법에 따라 내년 12월부터 시판되는 모든 담뱃갑에는 황갈색 포장지에 회사 로고를 빼고 똑같은 크기의 글꼴을 사용해야 한다.

호주 의회가 지난 21일 통과시킨 새 금연법에 따라 내년 12월부터 시판되는 모든 담뱃갑에는 황갈색 포장지에 회사 로고를 빼고 똑같은 크기의 글꼴을 사용해야 한다.

필립모리스는 “그런 포장이 호주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심각한 법적 문제를 야기할 것이란 우려가 확산되는데도 이를 무시했다”며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고 주장했다. 필립모리스는 또 새 법안 때문에 수십억달러의 손해가 예상된다며 국제중재와 별도로 호주 정부를 상대로 호주 고등법원에 소송을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재 호주에서 시판중인 필립모리스 담뱃갑.

현재 호주에서 시판중인 필립모리스 담뱃갑.

필립모리스가 국제중재를 하게 된 근거는 1993년 비준된 호주·홍콩 양자투자협정(BIT)이다. 조항 중 투자자-국가소송제, 즉 ‘지적재산의 불법 몰수’ ‘투자의 비합리적 방해’ 등을 근거로 호주 정부에 대한 국제중재를 신청했다.

호주 정부는 매년 담배 관련 질환으로 1만5000명이 사망하고, 매년 329억달러의 생산성 손실로 이어지는 만큼 이번 조치를 강행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니콜라 록슨 호주 보건장관은 “담배 포장은 담배회사들이 새로운 흡연자를 ‘죽음의 상품’으로 끌어들이는 가장 강력한 마케팅 수단”이라며 “담배회사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우리도 국민 건강을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호주 정부가 기업과의 법정공방도 불사하는 것은 기존 무역협정이 불공정하다는 결론에 따른 것이다. 호주 정부 산하 생산성위원회는 지난해 보고서에서 외국 기업을 우대하는 협정이 직접투자 증가 등 경제적 효과를 낳기보다는 사회정책 추진에 있어서 상당한 정책·재정적 위험 등 주권 침해의 우려가 있다고 분석했다. 크레이그 에머슨 호주 무역장관은 “투자자를 보호하는 무역협정을 맺은 과거 정부의 관행과 단절하겠다”고 보고서에서 밝혔다. 또 지난 4월 향후 모든 자유무역협정과 투자협정에서 투자자-국가소송제를 배제하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논의 중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도 이 소송 조항을 배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필립모리스의 호주 정부 제소는 한·미 FTA 비준을 계기로 투자자-국가소송제가 투자자들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보건·환경 정책을 뒤흔들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한 국내에서도 적잖은 파장을 낳고 있다.

필립모리스, 호주 ‘금연정책’에 제동… 공공정책 위협 현실로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은 22일 “투자자-국가소송제가 한 국가의 기본적인 공공보건정책을 잡고 휘두를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며 “우리 정부는 FTA에서 공공정책은 예외라고 주장하지만 필립모리스의 사례로 그 말이 거짓임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도 현재 담뱃갑 겉면의 경고문구를 현행 크기의 약 3배로 키우는 정책을 추진 중이어서 한·미 FTA가 발효되면 다국적 담배회사들로부터 상표권 침해를 명분으로 소송당할 가능성이 있다.

최석영 외교통상부 FTA 교섭대표도 “우리가 호주와 같은 금연정책을 편다면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개연성을 인정했다. 최 대표는 그러나 “호주·홍콩 양자투자협정에는 ISD 조항이 두루뭉술하게 들어가 있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걸릴 수 있지만 한·미 FTA에는 특별한 희생, 간접 수용 조건 등이 까다롭게 돼 있어 호주 경우와 동일하게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반면 송기호 변호사는 “정부가 주장하는 각종 요건들이 우리의 보건·환경정책에 보호막이 될 수는 없다”고 되받았다. 송 변호사는 “송사가 벌어질 경우 한·미 FTA에 포함된 ‘비례성의 요건’에 따라 정책의 목표(금연)와 정책수단(담뱃갑 표시규제)의 비례관계가 있어야만 승소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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