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소조항 그대로 포함… 정책주권 제약 ‘족쇄’로

2011.11.22 21:49 입력 2011.11.22 22:22 수정

22일 국회에서 통과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투자자-국가소송제(ISD), 역진방지(래칫) 조항 등 독소조항을 포함하고 있어 발효 뒤 한·미 양국의 정책주권을 제약하는 등 많은 문제점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이명박 정부는 미국과 투자자-국가소송제 재협상을 하겠다고 밝혔지만 제도 자체의 폐기를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또 공공정책 분야에선 정책 자율권을 확보했다고 하지만 이 자율권에 구멍이 뚫려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앞쪽)이 22일 국회 본회의장 의장석 아래에서 정의화 국회부의장에게 최루가루를 뿌리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앞쪽)이 22일 국회 본회의장 의장석 아래에서 정의화 국회부의장에게 최루가루를 뿌리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 투자자 - 국가소송제
초국적 기업 앞에 법·제도 무력화

최근 한·미 FTA 비준을 앞두고 한국사회에서 가장 논란이 된 조항은 투자자-국가소송제다. 한국이 기존에 체결한 양자간 투자협정 등에 이 조항이 포함돼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부는 이 같은 점 등을 들어 투자자-국가소송제가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미 FTA라는 무역규범에 편입된 투자자-국가소송제는 정부가 국제중재판정부의 결정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미국이 FTA 특혜관세의 정지라는 관세 보복을 할 수 있다. 또 한·미 FTA의 투자자-국가소송제에는 사전동의조항이 포함돼 있다. 투자자가 분쟁을 국제중재에 회부할 경우 한·미 양국 정부는 자동으로 이 회부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는 조항이다. 결국 사전동의조항이 있으면 중재 회부 결정권은 투자자에게만 있고 투자 유치국은 중재 회부에 대해 아무런 권한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살펴보면 투자자-국가소송제는 한·미 양국의 초국적기업의 손에 쥐어진 무기다. 투자자가 투자 유치국의 법적, 제도적 장치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도구인 셈이다. 또한 이 투자자-국가소송제는 ‘된서리 효과’를 수반한다. 공무원들이 한·미 FTA에 반하는 정책을 입안할 경우 투자자-국가소송제 제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위축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외교통상부는 “한국 정부가 외국 기업으로부터 제소를 당하거나 한국 기업이 외국 정부를 상대로 제소를 한 적이 한번도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법무부는 지난해 1월 펴낸 <알기 쉬운 국제투자분쟁 가이드>에서 “2000년도 이후의 세계적인 (투자자-국가 분쟁) 급증 현상 및 투자자-국가소송제를 인정하는 FTA, 투자협정 체결 건수의 증가로 인해 투자자-국가 분쟁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유엔무역개발위원회(UNCTAD)의 투자자-국가 분쟁 통계를 보면 2010년 말 현재까지 알려진 분쟁만 390건이고, 이 중 절반 가까이는 최근 6년 사이 발생했다.

투자자-국가 분쟁이 발생할 경우 이 분쟁을 해결하는 곳이 세 명의 변호사로 구성되는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인 것도 문제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미 보스턴대학 파디센터(Pardee Center)는 2009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발효 15년을 맞아 그해 11월 작성한 ‘북미 통상정책의 미래: NAFTA의 교훈’ 보고서에서 “중재자들은 향후 소송을 많이 하게 하고, 중재산업을 성장시키기 위해 투자자 편향적으로 법을 해석하는 편”이라고 지적했다.

■ 역진 방지 조항
한번 개방하면 되돌릴 수 없어

역진방지 조항 역시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꼽힌다. 역진방지 조항은 한번 개방하면 다시 되돌릴 수 없도록 하는 것으로, 한·미 양국의 입법권·행정권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톱니라고 번역할 수 있는 래칫은 기계를 앞으로만 갈 수 있게 하고 뒤로는 가지 못하게 한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 11일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 위성방송사업자,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 등 유료방송사업자의 국내 제작 영화 편성비율을 현행 25%에서 20%로 줄였다. 국내 제작 애니메이션 편성비율도 35%에서 30%로 낮췄다.

방통위는 외국 제작물의 1개 국가 편성비율 상한도 60%에서 80%로 상향 조정했다. 예컨대 현재 전체 외국제작물의 60%가 미국산이라면 앞으로는 80%까지 미국산 제작물의 비율을 높일 수 있다. 문제는 역진방지 조항으로 인해 한번 낮춘 의무편성비율을 다시 끌어올릴 수 없다는 점이다. 정부가 2006년 7월 스크린쿼터(의무상영일수)를 146일에서 73일로 줄인 뒤 다시 73일 이상으로 늘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 네거티브 리스트 방식
미국에 서비스 시장 무방비 노출

한신대 이해영 교수는 “지난해 미국과의 교역에서 제조업의 상품수지는 126억달러 흑자인 데 반해 서비스산업 수지는 123억달러 적자를 냈다”고 말했다. 서비스업이 전체 경제의 80%가량을 차지하는 미국과의 FTA는 대미 서비스산업 수지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문제는 한·미 FTA는 서비스 분야에서 ‘네거티브(포괄주의) 방식’의 개방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네거티브 방식은 개방하지 않을 분야를 부속서Ⅰ(현재유보), 부속서Ⅱ(미래유보)에 적어두고,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분야는 모두 개방하는 방식이다.

파생상품 등과 같이 새롭게 등장하는 서비스 분야는 미국이 한국에 비해 경쟁력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위험하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은 “현재 무규제 상태에 놓여 있는 민영의료보험에 대한 규제가 건전성 관련 조치 외에는 어려워지므로 지급률(보험료 대비 보험지급액) 규제, 상품 표준화 규제 등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 허가-특허 연계 조항
복제약 생산 어려워져 약값 오를 듯

허가-특허 연계 조항은 제약회사가 복제약을 만들어 식품의약품안전청에 시판승인을 요청할 경우 오리지널약의 특허권을 가진 제약회사에 이를 통보하도록 정하는 것이다. 통보를 받은 오리지널약 제약회사가 특허권 침해라며 소송을 제기할 경우 복제약 생산이 불가능해진다. 이 제도는 복제약 생산을 위축시켜 다국적 제약회사가 더 오랫동안 특허에 따른 이익을 얻게 한다.

우 실장은 “이 제도는 다른 상품에는 존재하지 않는 제도”라며 “자동차, 화장품 등은 기술, 안전, 환경 기준을 통과하면 시판이 허가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제도는 미국 민주당과 부시 행정부가 2007년 5월에 합의한 신통상정책에서 독소조항으로 규정돼 있다”며 “이 때문에 페루, 콜롬비아, 파나마 등이 미국과 체결한 FTA에선 이 조항이 삭제됐다”고 밝혔다. 우 실장은 “이 제도는 한·유럽연합(EU) FTA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한국 법률 개정을 통해 모든 나라에 동일하게 적용되므로 유럽의 제약회사도 이 제도의 혜택을 입게 된다”고 말했다.

■ 공공정책 분야 유보권
수용·보상, 공평 대우 의무는 빠져

정부는 공공정책 분야에선 미래유보(향후 정부가 규제를 강화할 수 있는 것) 등을 통해 정책 자율성을 확보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래유보 목록이 적혀 있는 부속서Ⅰ, 부속서Ⅱ를 보면 정부는 수용·보상 의무, 최소기준 대우 의무에 대해선 유보권을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법무부 자료를 보면 2008년 말 현재 투자자가 국가를 상대로 분쟁을 제기한 근거 중 63%가 수용·보상 의무, 최소기준 대우 의무 위반이다. 법무부는 지난해 6월 펴낸 ‘국제투자분쟁 공무원 교육자료’에서 “국제관습법상 공정·공평 대우를 (외국인 투자자에게) 부여할 의무 또는 수용에 해당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아야 할 의무를 위반했다는 주장은 외국인 투자자가 국제투자중재 사건에서 가장 빈번히 제기하는 사항”이라고 밝혔다. 법무부는 또 “투자 유치국이 공정하지 않고 공평하지 않은 대우를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불리한 쪽은 투자 유치국”이라고 밝혔다. 통상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부속서Ⅰ, 부속서Ⅱ 모두 수용·보상 의무와 공정·공평 대우로부터의 자율성은 확보하지 못했다”며 “필수적 안보 이익과 관련된 조치를 제외한 어떠한 공공정책도 이 두 가지 의무 위반을 이유로 국제중재에 회부당하는 구조”라고 말했다.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정책자문위원인 남희섭 변리사는 “우리 헌법에 따라 중소상인, 중소기업 등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국내 법률은 최소기준 대우 위반에 해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